2017/12/22NEW

“<사진기록>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②

이 책의 띠에는 “전쟁과 석탄산업의 희생이 된 조선인의 고난의 역사. 반세기를 넘어서 강제연행의 진실에 육박하는 사진 【380점】과 르포”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자는 논픽션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씨. 하야시씨는 하시마에 대해서 “여기서 얼마나 많은 광부들의 유혈이 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의 희생 위에 하시마의 역사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않 될것이다. 하시마는 관광자원이 아니고, 탄광희생자, 특히 조선인, 중국인의 추도 섬이다”라고 합니다. 하시마에 관한 르포를 도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증언을 합니다.

 

CLAIM

“<사진기록>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저자 하야시 에이다이/ 2010년 겐쇼보(弦書房) 발간

정면에는 통칭 지옥문이라고 불리는 노무담당자의 근무소가 있었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갱부들은, 평생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58페이지
총을 든 오오무라 연대가 경비를 했는데 회사가 소유한 아사가오마루라는 배에서 정연하게 하선했다고 한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2페이지
중국인에 대한 취급은 특히 엄격했다. 조선인이 말을 걸면 총을 든 노무담당자가 ‘가까이 가지 마’라며 조선인과 중국인을 둘 다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2페이지
한 명은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한 명은 목도를 들고 머리에 장착한 캡램프의 빛이 교차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87~188페이지
하시마 탄광의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한 오오무라 연대와 격심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한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2페이지
높이 1미터의 탄층에서 조선인 광부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곡괭이로 파고 았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92페이지
요시다 함바 담당의 채굴장을 찾은 ‘유’는 놀랐다. 2척층이라고 불리는 탄층은 약 60센티, 짧은 곡괭이로 누워서 석탄을 캤다. 캡램프의 코드가 목과 발에 말려있고, 머리가 천장의 암반에 닿았다. 단 10분 채굴했는데도 하반신이 저렸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92페이지
운명 공동체로서 일본인끼리 연대감은 생겨났으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차별은 한층 심해졌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2페이지
노무담당자는 조선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하등하다고 생각해 명령만 하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말투와 태도가 나쁘다며 때렸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7페이지
일본인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특히 조선인은 감기에 걸려도 병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외근 노무담당자에게 심하게 맞았다. 사무실의 전봇대에 전신을 묶고 앞을 지나는 갱부들에게 몽둥이로 때리게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6페이지
하시마 탄광의 외근 노무담당자는 모두 조선인이었으며 동포에게는 특히 엄격했다 조선인 광부를 몇 명 갱에 넣는가에 따라 실력을 평가 받았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강제로 갱에 넣었다. 그것이 노무담당자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95페이지
조선인 기숙사에 배급된 식량의 절반을 노무담당자가 빼돌려 집에 가지고 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반밖에 먹지 못했다. 힘든 노동을 견뎌야 하는 조선인 갱부는 식량마저 노무담당자에게 빼앗겼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69페이지
도착한 날의 식사를 입에 넣은 순간 다들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탈지 대두가 8할, 현미가 2할, 이상한 냄새가 나고 푸슬푸슬해서 젓가락에 집히지도 않았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92페이지
탈지 대두는 몸에 맞지 않았는지 먹은 후부터 복통이 일어나 화장실 앞에 긴 행렬이 생겼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92페이지
노예와 같은 노동에 견디지 못하고 최후 수단으로 섬으로부터의 도주를 시도했다. 바다에 던진 갱목을 부여잡고 바다 건너 노모반도로 향하지만, 격류에 휩쓸려 대부분 힘이 빠져 익사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74페이지
또는 탄광 측의 노무담당자 및 경찰에 체포되어 섬으로 끌려온 후, 일벌백계로서 고문을 당했다. 일본인의 경우는 자살(목을 매어)이 많았는데 조선인은 탈주를 시도하여 익사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74페이지
이 섬에 와서 깨달은 것은 탈주는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탈주에 성공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체포되면 노무담당자에게 고문을 당해, 시체는 바다로 던져질 뿐이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85페이지
탄광 측의 광부 탈주 대책은 철저했다. 하시마 주위를 모터보트가 돌았고 공습이 없는 야간은 서치라이트로 제방을 비추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86페이지
동료가 사고사를 당해 화장이 끝나면 감시하러 온 노무담당자의 명령으로 유골을 삽으로 퍼서 폐갱에 던져 넣었다.
“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158페이지

DISPROOF

“<사진기록>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를 검증한다

검증1 “평생 나오지 못한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검증2 총에 의한 진압과 감시에 관하여
검증3 탄갱 내의 노동에 대해서
검증4 조선인 노동자의 차별에 대해서
검증5 조선인 노동자 학대에 대해서
검증6 조선인 노무담당자에 대해서
검증7 식량 사정에 대해서
검증8 탈주에 대해서
검증9 장례에 대해서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
타다 토모히로,카지 히데오,이노우에 히데시,
혼마 히로야스, 츠보우치 미츠오키,코바야시 하루에,
마츠모토 사카에,사사야마 이사무,모리 야스히로,아다치 키요코
자료 제공 : 국립 국회 도서관

하야시 에이다이씨는 이 책의 “후기”에서, 11살이었던 쇼와18년, 신주(神主)이었던 아버지가 조선인을 몰래 숨겨 둔 것으로 특고경찰에 고문을 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돌아가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아버지를 고문한 90세의 그 당시 특고경찰을 찾아내 따지고 들었더니, “석탄의 한 덩어리는 총탄”이란 슬로건 아래, 석탄증산이 지상 명령이었던 시대, 조선인의 도주를 촉진한 것은 반국가적 행위이며, 배후 관계를 추구했다고 털어 놓고, 사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조국의 적이며 비국민였을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일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조국의 적, 비국민의 아이인 필자에게, 부모님이 남긴 목숨의 유산을, 역사에 단단히 새기는 것이 사명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하야시씨는 술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