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보우치 미쓰오키 씨①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 가토 코코
"쉬는 시간에, 이(李)의 집에서 조선에서 보내온 밤을 구워 먹었습니다"
도쿄에 사는 쓰보우치 미쓰오키 씨 (87). 1961년에 도쿄에 갈 때까지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 하시마섬을 계속 바라본 사람이다.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 전쟁 중에 조선인 노동자들과의 교류 등 당시 추억을 들었다. 제1회는 쓰보우치 씨와의 만남과 경력, 인터뷰 일부를 소개한다.
쓰보우치 씨와의 만남
쓰보우치 미쓰오키 씨 (사진 : 무라오 마사미)
2016년 1월 8일, 도쿄 고토구에 사는 쓰보우치 씨 아파트를 찾아갔다. 초인종을 울리자 쓰보우치 씨 (당시 84세)가 마중 나와 주었다. 백발로 몸집 작은 쓰보우치 씨는 체크 셔츠에 자주색 조끼 모습으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첫 대면에도 불구하고 유머 가득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디어 그 당시를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이런 기쁨으로 가득했다. 예정했던 2시간은 순식간에 지났다. 하지만 돌아갈 길에 못 들었던 질문이 차례차례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준비 부족이었다. 그 후에도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서 2016년 5월 19일, 10월 17일 인터뷰의 협조를 받았다.
1932년 2월 28일, 나가사키현 니시소노기 군 와키미사키무라 마쓰바라 (현재 나가사키시)에서 8남매(남동생 3명, 자매 3명)의 장남으로 태어나 3살 때 하시마섬에 이주했다. 애초 시오(潮)후리에 살았지만, 그 후 19호 동의 4층으로 이사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하시마섬에서 근로 봉사 (자갈 운반) 를 하고 있을 때 종전을 맞이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날, 쓰보우치 소년은 섬에서 그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쓰보우치 씨의 아버님은 광부였지만, 중일 전쟁에서 부상해서 귀국, 중국어를 잘했기 때문에 하시마섬에서 중국인 노무자 (150명)의 급여를 담당해서 그들을 돌보기도 했다. 아버님은 1949년에 서거 (아버님의 중일 전쟁 당시 사진은 여동생 이와사키 마쓰코 씨 제공, "군함도의 진실" 포토 갤러리 [링크 게재】 https : // www.gunkanjima-truth.com/에서 소개하고 있다). 쓰보우치 씨는 1957년 (쇼와 32년)부터 1961년 (쇼와 36년)까지 하시마 영화관에서 상영 기사를 맡았다. 1961년 (쇼와 36년), 석탄에서 석유ㄴ로 에너지 정책이 전환해서 29살 때 도쿄에 올라갔다. 자동차 부품 제조 업체, 공조기, 스테인리스 관련 일을 거쳐 정년을 맞이해서 현재에 이른다.
소년 시절의 쓰보우치 씨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쇼와 14년 (1939년)의 하시마섬
(출처:1939년 11월 11일 시미즈 건설 설계 자료) )
하시마섬 생활을 뒤돌아보며
--하시마섬 생활은 어땠습니까?
30대, 하시마섬에서 (사진 중앙)
"생활은 도쿄보다 나았다. 미리 알았다면 여기에도 오지 않았을 거야. 이제 54년이 되니까 어쩔 수 없지만. 하시마섬은 진짜 좋았어. 물가는 싸고 전기 요금, 방값, 수도 요금도 무료. 명목으로 십 엔 쯤 공제되었지만. 전기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어. 그 당시 다카시마(高島)에는 (双子(후다고)발전소)가 있어서 단층집처럼 발전하고 있었어. (중략) 음식도 회사 부담, 의복도 싸고. 기숙사에 식당은 있었어요. 매점에서는 식료품도 팔고,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요리도 했어요"
조선인에 대한 차별
-- 하시마섬에서 일하던 조선인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장, 이, 김. 동창생 3명이 조선인. 아마 3, 4학년 때. 휴식 시간이 대략 40분가량. 그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조선에서 보내온 밤을 구워 먹었어"
--어디서?
"이(李)의 집에서. 그 당시는 화로. 겨울에는 재로 숯을 덮으면 제대로 불탔어"
--그렇구나.
"거기서 밤을 구워서"
--화로에?
"화로 안쪽 주위에"
--구울 수 있었나요??
"뜨거워서 그래요"
--하지만 시간이 걸리겠지요?
"숯불이니까 가능해요. 먹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요"
--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괴롭힘이 있었나요?
"가끔 싸울 때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을 거야. 조선인 여자, 의사, 간호사도 있었어요. 의사는 그때 아마 30대"
--노예노동은 없었나요?
"일본인도 조선인도 병원에서 치료받고. 간호사는 한두 살 나이가 많았을까. 그러니까 차별이란 전혀 없었어요"
--섬에서 도망한 청년들을 학대했다, 그런 광경을 보신 적은?
"만약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작은 섬이니까 소문이 퍼질 거야. 조선인들이 숙소 앞을 지나갈 때 그들이 잔소리를 듣는 것은 봤지만, 학대는 없었을 거야. 우리 함께 학교에서도 놀았어요"
--쇠창살은?
"그런 게 없어"
--종전 시 조선인들의 모습은?
"잘 모르네요"
--동급생들은?
"어느새 떠나버렸어요"
--어느새?
"언제 떠났는지 몰라요"
--옛 도민들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네요.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나요?
"절대 없어. 일본인도 한국인도 일이 혹독하면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게으르면 잔소리도 듣고"
--게으르면?
"그래요"
--일하라고.
"죽도를 가진 사람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관리도 엄격했고 그 대상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마찬가지"
--게으른 사람에 일하라고 말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는 것인가요?
"맞아요"
--"설사해도 (일본인이) 몽둥이로 구타를 했다" 이런 조선인의 증언이 있습니다.
"숙소에는 일본인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했고 담당자도 조선인. 일본인 관리자는 그리 없었을 거야.
--조선인의 노무 담당자도 조선인?
"일본인 담당자는 적었을 거야. 숙소는 하나밖에 없었어"
(다음 회에 계속)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