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NEW

웹 사이트 개설에 대해서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카토 코코

머리말

"군함섬(하시마)의 진실 (www.gunkanjima-truth.com)"은 제2차 대전 중의 하시마 (나가사키현)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산업과 생활에 대한 역사 사료,또 체험자들의 목소리를 발신하는 웹 사이트이다.


본 웹 사이트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서는 후술 하지만,진실을 이야기하고,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고 싶다는 많은 증언자들의 마음에 부응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또한 일본 정부와 유네스코 (유엔 교육과학 문화기구)와 연동하는 것이 아니라,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이하‘국민회의’)가 중심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수집 한 사료를 발신 하고있다.수집 한 사료에 대해서는 순차적으로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 한국어로 번역하여 전세계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 할 예정이다.

본 웹 사이트를 개설 함에 있어서 많은 분들의 협조와 따뜻한 지원에 대해서 우선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당시 기억을 되살려 역사의 틈새를 메우는 작업에 진력해 주신 증언자 분들의 열정 없이는 본 웹 사이트의 실현은 불가능했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제강, 조선,석탄 산업 ’과 하시마 탄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북쪽은 이와테, 남쪽은 가고시마까지 8현 (이와테현,시즈오카현,야마구치현,후쿠오카현,사가현,나가사키현,구마모토현,가고시마현) 11시 (가마이시시,이즈노 쿠니시,하기시,기타큐슈시,나카마시,오무타시,나가사키시,사가시,아라오시,우키시,가고시마시)의 넓은 지역에 위치하는 23곳의 유산으로 구성된 대형 세계유산으로서,미쓰비시 중공업주식회사 나가사키조선소와 신일본 제철 스미킨 주식회사 야하타제철소 등 민간기업의 현역 산업시설,미이케항 등 대규모 산업관련시설과 폐허로 알려진 하시마도 포함 된다.‘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19세기 중반, 두 세기 남짓한 오랜 세월동안 서양 과학에 문을 닫고 있던 동양의 섬나라가 불과 반세기만에 공업 입국의 토대를 마련하고 급속히 산업화 된 과정을 시대별로 보여주고 있다.즉 우리 나라의 중공업 (제철·제강,조선,석탄 산업)에 일어난 큰 변화,국가의 질을 바꾼 반세기의 산업화를 나타내고있다.

구성자산의 하나 인 하시마 탄갱은 다카시마에서 남서쪽으로 3 km 떨어진 섬으로서 니시소노기(西彼杵)해양 탄전을 광상으로 하고 있다.미쓰비시는 석탄 산업의 근대화의 선구자가 되었던 다카시마 탄광경영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하시마 구입을 결정 했다. 같은 탄전을 광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하시마 석탄은 다카시마와 마찬가지로 탄질이 좋아 비싼 값으로 팔렸다.1891년부터 하시마에서 출탄되고 6년 후에 하시마는 출탄량이 다카시마를 능가했지만, 채탄량이 증가함에 따라 거기서 나오는 보타 (폐석)를 이용해서 섬 주위를 매립,확장했다.바위로 된 작은 섬을 둘러싼 새로운 토지는 높은 파도에서 섬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와 같은 호안에 둘러싸였다. 전성기의 하시마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과밀한 탄광 커뮤니티였다.

1900년,하시마에서 등불이 켜졌다.에너지 혁명으로 전기가 보급되어 전동 권양기가 도입되었다. 하시마의 해저 깊은 곳에서 안정적으로 굴진하고 채탄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윽고 하시마는 세계 굴지의 해양 탄갱으로 성장했다.하시마 해저에서의 채탄 경험과 기술로,미쓰비시는 현대 탄광 경영의 토대를 구축하고,미이케를 포함한 전국의 탄광, 나아가 아시아 탄광으로 기술이 전파되었다.하시마는 그 실루엣이 전함‘토사’를 닮아서‘군함섬’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전쟁 후도 조업을 계속하고 일본 산업의 부흥을 뒷받침 했지만,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전환이 진행 됨으로서,하시마 탄갱은 1974년 1월에 폐산 되었다.현재는 폐허가 되어,나가사키시가 관리 하고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의 과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2015 년 7 월 독일의 본에서 개최 된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전술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가치는 인정했지만, 결의로 8항목의 과제를 제시했다. 또한 정부는 일본 대표단의 성명에 유의해서, 세계유산 가치의 대상기간 외인 제 2 차 대전 중의 한반도 출신자의 전쟁 중 징용의 전시를 포함 한 인터프리테이션 전략을 준비하게 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2017 년 11 월 30 일,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센터에 8항목 과제에 대한 진행 상황을 보고 했다.
(* http://www.mofa.go.jp/mofaj/pr_pd/mcc/page3_001285.html)

왜 제 2 차 대전 중의 하시마가 문제로 되었는가?

본에서 개최된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에 이르기까지의 배경에는 등록을 둘러싼 한국 정부 및 시민 단체의 엄청난 반대 운동이 있었다.시민 단체는 하시마를 표지 사진으로,‘도난 당한 국가,납치 된 사람들’이라는 소책자,“눈을 떠라 유네스코,눈을 떠라 세계,눈을 떠라 인류”라고 적힌 팸플릿,“유네스코는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있는가 ”라는 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했다. 배포된 문서에 생생한 사진도 게재되고 있었다. 진위 및 출처가 불분명 한 것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을 통해 ‘하시마는 지옥섬이다'라는 인상이 세계에 퍼졌다. 이러한 치열한 홍보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대표단은 스스로 원래‘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가치에서부터 ‘제 2 차 대전 중의 산업 노동 '에 관심을 옮기게 되고, 그 중에서도 하시마 탄갱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 되었다.

하시마 탄갱에서 한반도 출신자 노동이 마치 역사의 어두운 부분 인 것처럼 널리 퍼졌다. 그 것은 남독일 신문 (2015 년 7 월 6 일자)에 씌여 졌다. 신문은 "군함섬이라고 불리웠던 하시마에서 강제 노동자들은 고통을 받았다.전쟁 중에는 일본인 노동자는 안전한 곳에 옮겨져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강제 노동을 대신했다" "(중국과 한국의 강제 노동자) 1000 명 이상이 이 섬에서 죽었다." "(중국과 한국의) 강제 노동자의 시체는 바다 또는 폐갱에 버려졌다"라고 썼다. 홍보 활동이 독일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있는 문장이었다.

이 기사는 우리가 서적,귀중한 역사 자료와 증언을 국내외에 널리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역사의 진실’을 생각해보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여, 국민회의의 이사 및 평의원과 협의하여 본 웹 사이트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본에서 귀국해서


본에서 귀국하면 당장 전쟁 중의 하시마 노동에 대해 쓰여진 여러 책을 정독하기로 했다. 우선 ‘지쿠호·군함섬’‘(하야시 에이다이 弦書房)과 ‘군함섬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 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록’(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 사회평론사),‘원폭과 조선인’(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등 한국 측 주장의 원점을 읽었다. 거기에 기재된 증언은 본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포 된 문서의 ‘군함섬은 지옥섬’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학대와 가혹한 노동의 증언이었다. 다만, 구체적인 작업 현장의 시설이나 작업 내용, 생활 풍경에 대한 세부 사항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일차 사료를 수집하기로 했다. 하지만 관계자에 따르면 일차 사료는 보관이 확산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소실,완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의 관련 자료를 모아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이차 사료의 수집도 했다. 이차 사료 정리 과정에서 운동론이 전개되어있는 것이 많아서, 기업의 가해 책임을 추궁하는 자세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피해를 강조한 내용은 최대한 정중하게 살펴 보기로 했다.

정보 수집이 진행 되면서 70여년전 전쟁 중 산업 현장의 기억, 주민들과 관계자 모두가 전화 (戰禍) 속에서 필사로 증산 체제를 떠받친 하시마 탄갱의 직장과 생활의 기억은 아직 충분히 정리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 당시 하시마 주민들의 증언을 수록하기로 했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르신 분들이어서 그 당시 기억을 가진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몇 명의 그 당시 하시마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옛날의 연하장을 찾아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그 당시 동료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어 소식이 없었던 사람둘에게 연락하면 노인 양로시설에 계시는 분, 누워만 계시는 분,기억이 확실하지 않은 분, 돌아가신 분들도 많았다. 90세 가까이 되면 인터뷰 하는 동안 문제 없어도 ,그 후 컨디션이 안좋은 분들도 계시고 70여년전의 기억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주민들의 대부분은 일단 흉금을 털어 놓으면 향토애를 가지고 모두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말 수가 적었던 사람들도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이야기가 더 많아 졌다. 그들과 수차례 만나서,또 여러 명이 만나게 되면서 풍화된 기억,단편적인 기억도 퍼즐이 채워질 때처럼 그 당시 정경이 선명하게 되살아 갔다. 그런 대화를 통해서 그 당시 하시마 주민들이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주민회'를 발족, 하시마의 진실을 탐구하는 활동은 더욱더 활발 해졌다.본 웹 사이트를 보시면서, 그들의 증언으로부터 하시마 노동과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민회의에서는 제한된 인력으로 현재도 일차 사료를 수집 중이며, 정리 된 사료를 앞으로 단계적으로 공개 할 예정이다. 사료의 정리가 진행되면 언제든지 이것들을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발신 해 나갈 생각이다.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
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