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NEW

하시마에 관한 상세 연표

메이지(明治)원년(1868년)으로부터 쇼와(昭和)20년(1945년)의 종전까지의 하시마에 관련되는 주된 사건을 “탄광지 나가사키현 석탄사 연표 마에카와 마사오 편”으로부터 인용하고, 연표에 정리했습니다.

 

端島年表

1868년<메이지원년>(하시마) 고야마 히데노신小山秀之進개발 상8척층上八尺層 1882년까지
(오래된 동굴 조사 1959~1960 후쿠오카 통산국 석탄부 실시,소장)
1870년<메이지3년 >(하시마) 다카하마촌高浜村 하시마에서 개발 후카호리촌深堀村 소재 사족士族  와타나베 분로渡辺聞櫓, 深堀楳伍(1874 년 당시=9,000평, 2,000엔)
(차용구역 개발허가 청구 1874년 나가사키현 권업과 편  나가사키현립 나가사키도서관 소장)
1873년<메이지6년> 1월(하시마) 출탄 1~6월 983톤, 7월~12월2,168톤 計3,151톤 평균263톤/월
(치쿠호 석탄광업史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74년<메이지7년> 8월(하시마) 다카하마촌高浜村 하시마에서 2탄갱 개업 본년은 출탄 없음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74년<메이지7년> 8월(하시마) 하시마에 광구 취득 후카호리촌深堀村 鍋島孫六郎(구 후카호리 영주) 1890.8이와사키에
(광산 납세액대장納税額台帳 1874년 이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현립 나가사키도서관 소장)
1875년<메이지7년> 9월(하시마) 구마모토현 아마쿠사天草 소재 고야마 히이데小山秀, 나가사키현 하시마 광산 소유주 와타나베 분로渡辺聞櫓, 深堀楳伍(대리인 古賀松一郎)과, 1875.9.1~1877.2을 기한으로 정해 동 갱의 출탄 청부 계약을 체결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75년<메이지8년>(하시마, 오시마, 고야기시마) 다케노우치 쓰나竹内綱는 하시마, 오시마, 고야기시마에서 채굴
“저는 다카시마 부근에 있는하시마, 오시마, 고야기란 3까지 성의 석탄갱을 후카호리 일가(후카호리 일가는 사가번佐賀藩의 가신)로부터 위양받고, 메이지8년(1875년) 말부터 잇따라 개발에 착수하여, 메이지10년(1977년) 6월 결산기에는, 3성망으로 한달씩의 출탄 2,1000톤에 달한다”(다케노우치 쓰나竹内綱 자서전 1968년 메이지 문화전집 제25권 잡사(雑史)편수록 일본평론사)
1876년<메이지9년> 6월(하시마) 하시마탄광 청부인 고야마 히이데小山秀는, 동 갱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아마쿠사天草의 사유지, 가독家督(집안에 대한 일체의 상석권)를 저당으로 후카호리深堀회사로부터 15,000엔을 차용하여, 잡비에 충당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76년<메이지9년> 7월(하시마) 하시마탄광 청부인 고야마 히이데小山秀는 동 갱을 부흥하기 위해서 영국 상인 그래블英商グレブル과의 정식 계약을 계획했지만,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음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77년<메이지10년> 1월 22일(하시마) 나가사키 공작분국工作分局은, 나가사키현 출신 고야마 히데小山秀의 요청에 따라 배를 대여하여, 나가사키~하시마 간을 석탄기선으로 매일 왕복함(기간은 3.3까지)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82년<메이지15년> 12월(하시마) 고야마 히이데小山秀로부터 鍋島孫六郎에 1890년 미쓰비시三菱에
(오래된 동굴 조사 1959~1960 후쿠오카 통산국 석탄부실시, 소장)
1886년<메이지19년> 12월 22일(하시마) 다카토리 코레요시高取伊好, 鍋島孫六郎(구 후카호리 영주)로부터 하시마 탕갱의 재흥을 위탁 받았다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87년<메이지20년> 8월 12일(하시마) 미쓰비시 하시마, 해수 침입에 의해 갱내침수 사망자32명 부상자다수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87년<메이지20년> 12월(하시마) 상8척층上八尺層채탄 목적으로 제1수갱
(일본탄광지 1908.9 고노에 키타로高野江基太郎저술 (주)마루젠丸善)
(본방本邦중요광산요람(다이쇼7)1918 농상무성 광산국편찬 광업신보사)
1887년<메이지20년> 12월(하시마) 미쓰비시 다카시마, 하시마 제1수갱(깊이 27m, 길이 3.3m, 폭 3m)를 개착, 잇따라서 1895년 제2수갱도 개착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89년<메이지22년> 11월 중순(하시마) 광부 임금 인상요구 회사측이 거절하여 불온한 분위기 광부는 사택에 집합하여 태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0년<메이지23년> 8월(하시마) 미쓰비시三菱는 鍋島孫六郎(구 후카호리 영주)의 하시마 탄갱을 10만엔에 매수
동시에 해저 광구25만1000평을 취득.
「이로인해 다카시마, 나카노시마, 후타고지마와 하시마를 잇는 광대한 해역의 해저에 잠자는 무한의 보고는 미쓰비시의 손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이와사키 야노스게 전기 1971 동 전기편찬회 편간)
공사 개시(일본탄광지誌 1908.9 고노에 기타로高野江基太郎 저술 (주)마루젠丸善)개량을 해서 1891.2, 채굴
1890년<메이지23년> 9월 1일(하시마) 미쓰비시가 차 있는 물을 배수 메이지24.2 채굴개시
(본방本邦중요광산요람(다이쇼7)1918 농상무성광산국편찬 광업신보사)
1890년<메이지23년> 9월 (하시마) 채굴 개시(원료탄)
(전국탄광요람(쇼와33년3월말)1958.9 통산성)
1891년<메이지24년> 2월(하시마) 미쓰비시, 다카시마 갱・하시마 갱의 채굴개시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2년<메이지25년> 9월 12일~14일(하시마) 광부300명이 채탄분쟁으로 태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3년<메이지26년> 11월 3일(하시마) 미쓰비시, 하시마 소학교 개교식을 거행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3년<메이지26년> 12월(하시마) 530척(尺)의 새로운 수갱 개삭(159m)다음해에는 3수갱을 개삭 해저 아래1,600척(480m)에 이르다.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제2수갱 개삭開削 160m(530尺)에서 호마5척층胡麻五尺層 착탄
(본방本邦중요광산요람(다이쇼7)1918 농상무 성광산국편찬 광업신보사)
1894년<메이지27년> 2월 23일~24일(하시마) 광부200명이 식사의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태업, 사원・경관의 설득을 듣지 않고 창고 등을 파괴
24일 오후20여 명의 경관출동, 광부39명을 체포하여 진압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4년<메이지27년> 12월(하시마) 제3갱 개발시작 제4층 5척층五尺層, 가장 아래의 1장층一丈層 에 착탄
(본방本邦중요광산요람(다이쇼7)1918 농상무 성광산국편찬 광업신보사)
1896년<메이지29년> 12월 17일(하시마) 제2수갱의 채굴을 개시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7년<메이지30년> 2월(하시마) 제1갱,갱내화재로 물 주입, 폐갱(상8척층上八尺層)에 남은 것은 2,3갱뿐
(나가사키의 석탄 집산集散 大7 나가사키상업회의소)
(본방本邦중요광산요람(다이쇼7)1918 농상무 성광산국편찬 광업신보사)
1897년<메이지30년> 4월 13일~24일(하시마) 광부3,000여 명이 동맹태업, 합숙소장2명을 살해,경관의 설득으로 진정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897년<메이지30년> 11월 26일(하시마) 중간관리자 등에 대한 대출금 약5,493엔을 회수할 기미가 없어서 포기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00년<메이지33년> 9월 18일(하시마) 갱내외의 소유건물에 전등 공급을 인가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03년<메이지36년> 3월 3일(하시마) 낙반사고사1 제3갱 14사卸 제3편반片磐 24호에서 채탄종료후, 낙반사고
히로시마시 소라자야쵸空鞘町 248 평민 串田修蔵(25)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4년<메이지37년> 10월 28일(하시마) 가스폭발, 9명피해 
광부 가고시마현 출신, 岩山信全(28) 전신 크게 부상, 생명위독,
광부 에히메현 출신, 吉松市五郎(20),
광부 반장 후쿠오카현 출신, 藤原米太朗(40),
同 시마네현 출신, 柏井菊太郎(37),
광부 가이제촌皆瀬村232, 豊岡源太郎 
외4명은 몇 군데 화상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5년<메이지38년> 8월 11일(하시마) 태풍으로 피난, 불만 속출 233명을 당일 해고
폭풍우로 사택 30동이 완파, 9동이 반파 등 약 20만엔의 피해. 사택에 사는 850인(가족포함1,200인) 병원・소학교에 나누어 수용
「지금까지는 세명, 혹은 다섯명씩 기거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이야기가 광부 대対 탄광회사의 문제로 옮겨가면서 어떤 사람은 가혹한 대우(중략)열악한 식사, 급여에 대한 불만, 사무원의 거만함(중략), 일시에 평소 쌓였던 불만과 자기멋대로의 불평이 터져나왔고(중략)시끄럽게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해, 파업을 하겠다 같은 과격한 말들을 하는 사람도 있어, 불온한 분위기가 되면서 살기가 등등해 졌다(중략)주요 사무원들이 집회를 열어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정.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금일(11일)부로 해고, 즉시 하시마를 떠나도록 전하는 한편 엄중히 경계. 233명의 광부가 반항하지 못하고 나가사키로 이동. 경찰이 나가사키 상륙장에서 신체검사. 훈계 후 노동자들은 시내 여러 직업알선소(114人), 또는 지인의 집 등을 찾아가다」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6년<메이지39년> 7월 4일(하시마) 탄차사고로 중태
광부 長尾庄之助(30) 가고시마현 출신=하시마탄광 사택 坂田政七씨의 합숙소에 동거 오후3시경, 탄차를 끌어올리던 중,천정에 머리가 눌리며 아래의 탄차에 추락,허리에 타박상 휴업6주간의 중태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6년<메이지39년> 7월 16일(하시마) 광부4 명 도망 
미나미다카기타아리마촌 자타니가와南高北有馬村字谷川 城谷辰雄(17),
에히메현 온센군 신하마무라温泉郡新浜村 411 村木元吉(19),
에히메현 기타군 우치코무라喜多郡内古村 1164 東田頼光(20),
히로시마시 텐마쵸伝馬町 321 若狭樽一(19) 
최근의 무더위속 노동을 참지 못하고 밤10시넘어 4명이 공모하여, 동촌 가스노하나瓦斯の鼻 해안 에서 길이2간(약3.6m), 폭1척5촌(약45cm)의 널빤지를 잡고 헤엄쳐 건넜다. 樽一는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와 탄광회사에 신고. 회사측 배로 추적을 했으나 어둠때문에 행방이 불명. 그 후 상륙의 흔적은 없고, 익사의 가능성도 있음.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7년<메이지40년> 1월 24일(하시마) 사고, 중상1 광부 友成徳重(50)오이타현 출신=帯屋藤助 씨 집 거주 오전1시,제3갱내 제7수평갱(片盤) 증기사蒸気卸, 건설반장이 놓친 레일이 양다리와 오른쪽 허리에 맞아 휴업50일의 부상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07년<메이지40년> 2월 13일(하시마) 갱내의 펌프 및 권양기 작업을 공사비15만엔에 전기설비로 교체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07년<메이지40년>(하시마) 미쓰비시 하시마 노동상황(3월~8월경)
①광부모집인 응모자1인당 3엔씩 수수료를 얻음. 탄광을 낙원인 것처럼 꾀어 사람들을 기만함.
②광부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며, 모집인의 감언이설에 속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③회사는 매춘부를 고용하여 몇 군데 영업장을 개업시키고,도박을 장려.
④광부는 불쌍하게도 이 함정에 빠져, 가불을 한 약점 때문에 자유를 빼앗긴 상태.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明治41年<1908年>7月24日(端島) 신입 광부 감정 대립으로 인해 불만 폭발, 수십명이 탄광사무소・파출소를 습격하여 사망자1명, 중상2명, 경상20명 발생. 광부60여 명 구인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08년<메이지41년> 7월 24일(하시마) 폭동 경관29, 헌병7출동 회사 자력으로 진압 체포55,해고37
<신문기사>
생활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하숙집에서 쫓겨난 광부가 직업소개소의 과장에게 다른 하숙을 알아봐 달라고 할 때, 사무원으로부터 욕을 듣자 사무원을 폭행, 파출소에 연행되었다. 파출소에 동료가 찾아와 순사와 다툼을 벌이다 50~60명이 파출소를 습격, 내부 도구 등을 파손하고 갱목을 집어 던졌다. 순사부장 이하 3명은 안쪽으로 피해 무저항. 이후 근처의 잡화점 3곳에 난입하여 점원 1명을 살해하고 술, 통조림, 담배 등을 약탈. 차차 집단은 한 명, 두 명 씩 줄어 그대로 사태는 진정되었다. 억류된 광부를「데리러 왔다가 내친김에 자신들의 울분을 풀고, 전부터 자신들을 무시하던 사무원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었던것 같다. 그 와중에 동료끼리 싸움이 나 중상24. 우메가사키梅ヶ崎, 나가사키 두 경찰서는 비상소집. 우메가사키 경찰서(서장, 경부1, 순사13, 형사3)는 나가사키 경찰서(경부1, 순사10)의 지원을 받고 나가사키 헌병분대(오장 이하7명)도 급파. 56명 검거, 흉도소집죄凶徒嘯集罪(집단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해산에 불응할 경우 처벌하는 죄)로 55명 체포. 이것을 계기로 성적이 나쁜 37명을 해고. 손해는 예상외로 작아 800엔, 대부분 복구. 당사자들도 순순히 순종. 다카시마 분서 및 우메가사키 경찰서10명이 계속 경계중(평소 주야 각 350명 취업)
(동양 히노데 신문 1902~1934 동양 히노데 신문사)
1911년<메이지44년> 5월 7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3 오전8시
광부 福田富三郎(24) 오카야마현,
同 細木早夫(23) 고치현,
同 松中久次(24) 돗토리현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1년<메이지44년> 10월 24일(하시마) 병에 걸린 광부,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방랑하다 자살
광부 高野茂四郎(38) 오이타현
①하시마탄광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임질로 자주 결근 「탄광측에서 여비로 3엔80전을 주며 해고」
②나가사키에 와서 방황하는 중 여비 탕진
③7.1 코야기香焼 탄광의 광부 小笹友次郎(49)를 찾아가(42년 9월, 오기유키하라小城柚木原 탄광시절의 친구), 그의 알선으로 7.14~8.27까지 일을 했으나, 병이 심해져 友次郎에게 신세를 지게 됨
④友次郎도 눈병때문에 자주 쉬게되면서 도구를 팔아 입에 풀칠을 하게 됨
⑤10.23 마쓰시마松島 탄광 합숙소장 江島佐八는 2명의 친구로 경제적 여유도 있으므로 당분간 佐八에게 신세를 지려고 나가사키에 와서 데지마수에히로정 2-3, 직업소개소를 하는 黒川彦十 집에 묵는다.
⑥友次郎에게 술을 사달라고 한 뒤「아아, 이것만 마시면 더 이상 한이 없구나」라고 농담을 하며 마심
⑦10.24(다음날)오전4시, 茂四郎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림. 友次郎는 변소에 간다고 생각함
⑧오전7시「건조대에 쓰레기통을 밟고 훈도시를 한 모습으로 목을 맨 남자」를 인근 주민이 발견
⑨가슴에 団九郎兵衛, 등에는 우메와카마루梅若丸의 문신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2년<다이쇼원년> 11월 17일(하시마) 광부 2명이 견습감독을 집단폭행
광부 島崎(37) 나가사키시
광부 安田(22) 돗토리현
견습감독 坂井矩一
오후12시,무단으로 갱 밖으로 나온 島崎를 坂井가 발견, 말다툼하는 것을 安田가 와서 중재 하다가 광부2명이 坂井를 집단폭행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3년<다이쇼2년> 7월 5일(하시마) 도박에 빠진 광부, 자살
건축반장 能勢龍太郎(40) 가고시마현=사택 桝谷喜三郎 씨의 합숙소에 동거 싸움이나 다툼은 전혀 없었으나 도박에 빠져 도박할 돈이 없자, 松尾武治에게 ‘이사를 하려하니 桝谷로 부터 빌린 17엔을 갚게 17엔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여, 그 돈을 다시 도박으로 탕진. 그외에도 여러 건의 빚 있음. 후회와 염세에 빠져, 오후8시, 제2갱내 제2수평갱(片盤)에 내려가, 높이2m(7척尺)의 지지대에 목을 매 자살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3년<다이쇼2년> 8월 1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2명 오후1시 작업중
광부 佐々木関蔵(24) 모리야마촌森山村 
광부 宮脇清(19) 에히메현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3년<다이쇼2년> 8월 10일(하시마) 탄차사고 사망4명, 중상3명
<사망>광부 木村儀助(26) 고치현, 横川丑之助(37) 가고시마현,  宮副熊市(28) 나가사키현, 栗原止(25) 히로시마현, 외 중상3명 
신호담당자가 과실, 핸들 조작 실수로 탄차가 쉼터에서 휴식중이던 40~50명을 덥치다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3년<다이쇼2년> 11월 20일(하시마) 탄차사고 중상1명
岡田鶴松(40) 에히메현 탄 운반중 탄차에 깔려 중태 오후4시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4년<다이쇼3년> 7월 26일(하시마) 신입광부, 탈주계획을 하다 내분으로 상해
<가해자>相原(26) 에히메현
<피해자>内山豊(19) 히로시마현
2명은, 6월 7일, 히로시마 우지나宇品에서 광부모집에 응해 동 탄광에 왔으나, 일이 의외로 힘들고, 생각했던 것과 달라 탈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内山가 도중에 변심. 相原가 칼로 중상을 입혔다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4년<다이쇼3년> 11월 26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2명
광부 浦幸右衛門(31) 호쿠쇼나카노촌北松中野村
광부 田中広(21) 三井郡
오후2시 반, 12사갱(卸) 제1수평갱(片盤) 휴식중 낙반사고, 2명 모두 사망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5년<다이쇼4년> 3월 22일(하시마) 탄차 사고사 1명
광부 新浜小一(21)
오후 10시 40분, 갱내 증기사蒸気卸, 9편片 우측 갱도 교차부분에서 탈선한 탄차와 침목 사이에 머리가 끼어 사망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5년<다이쇼4년> 5월 1일(하시마) 12척층12尺層 착탄을 축하함
전부 휴업하고, 하시마를 지켜주는 콘비라 신사金毘羅神社의 임시 제전을 실시하여 미코시(神輿:신위를 모신 가마)를 옮기는 행사를 실시
광부 및 음식점 조합쪽으로부터 전통춤을 추는 팀이 참가, 쉼터에서 야간에 연극공연을 자유로이 관람, 불꽃 수십발을 쏘아 올리는 등 성황을 이뤄 섬 전체가 축제분위기, 지원을 위해 순사2명을 파견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5년<다이쇼4년> 7월 8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 광부 山中栄太郎(33) 나가사키 출신=吉田忠太郎 합숙소, 오후 4시 작업중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6년<다이쇼5년> 1월 27일(하시마) 가스폭발 사망3,중상3,경상3
제3갱내 직하196m(108間) 갱아래의 북동쪽에 1131m(622間)의 18편片12척尺 증기사蒸気卸 우측25일, 인력 선풍기가 (토오미唐箕라고 부름)낙반사고로 망가져 26일부터 전력기로
27日오후4시 반, 전동기에 고장 발생(회전축에서 불꽃) 오후7시 반, 수리가 종료되어 전기를 보내는 순간 폭발
<사망>전기공 岩尾博人(21) 구마모토현, 광부 村中夘一(18) 야마구치현, 광부 梅川安太郎(48) 에히메현
<중상>광부 山下原当(29) 가나가와현, 광부 宮本文次郎(35) 효고현, 광부 潮仲蔵(30) 야마구치현
<경상>전기공 恋塚伴十(27) 사자촌佐々村, 광부 木原軍司(28) 히로시마현, 광부  宮田金右衛門(42) 히로시마현, 광부 一の瀬喜久雄(26) 오이타현 석탄보관고를 만들거나, 자재운반,채탄작업에 종사중인 사람
<責任>갱노무책임자 西川信男, 전기책임자 山口格一, 전기공 恋塚伴十3명의 과실치사죄가 예상된다
(큐슈 히노데 신문 1899.12~1918.2 큐슈 히노데 신문사)
1916년<다이쇼5년> 3월(하시마) 갱내 수도관 설치 공사완성(가스폭발 예방을 위해 다이쇼4년부터 착수手)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16년<다이쇼5년> 3월(다카시마・하시마) 갱내재해에 대처하기 위해 다카시마,하시마,후타고지마 공용의 드레이거 식(ドレーガー式)구조기 2벌을 구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16년<다이쇼5년> 3월 (다카시마・하시마) 소년, 부녀자의 갱내 노동을 시험하다(3월중에 14세 이상~16세 미만의 소년, 5월중에 부녀자에게 갱내 작업을 시켜 성과를 거두다)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16년<다이쇼5년> 8월 3일 광부노역부조(扶助)규칙제정(농상무성령 제21호)
「노동계약의 당사자인 광업권자와 광부 사이의 합숙소장 같은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고용 및 노역에 관한 광업업자가 직접 지켜야할 자세한 사항이 정해졌다」
(광부고용상태에 관한 조사 쇼와4 후쿠오카 지방직업소개사무국 편)
1916년<다이쇼5년> 9월 탄광재해를 일정한 양식에 따라 월보로써 보고하도록 광업경찰규정을 개정
「가스 혹은 탄진의 폭발, 화재, 수해 그 외의 재해에 의해 사망자나 중상자가 발생했을 때는 그 사유 및 상황을 광무서장(鉱務署長)에게 급히 보고하고, 사망자나 중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업의 전부 혹은 일부 중단하게 될 경우에는 마찬가지다, 전항의 경우에는 재해의 경과 및 그에 대한 처치를 지체없이 광무서장에게 보고할 것」(제64조)
「사상자, 병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양식에 따라 광무서장에게 보고할 것」(제65조)
재해사유는 갱내15개항, 갱외8개항을 정하고, 종별로는 횟수, 사망, 중상, 경상으로 나눠 ,쇼와4년 광업개정법까지 실시
(광산보안년보(쇼와24년도판)1951.8.13 통상산업성 자원청광산보안국)
1918년<다이쇼7년> 5월말(다카시마)노동상황 「다카시마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갱내부)는,메이지30년 합숙소장 제도를 전부 폐지한 이래, 소위 함바(飯場)제도를 운용하지 않고, 모두 탄광 직할이 됨.다이쇼7년5월말일 현재 재적 갱내부 인원은 다음과 같다.
다카시마 1,144명(중 조선인84)
후타고지마  774명(중 조선인12)
하시마  941명(중 조선인70)
합계 2,859명(중 조선인166)
그외 세 개 탄광에
갱외부 477명(중 조선인168)이 있다.
노동시간은 1조가 오전4시~오후4시까지, 2조가 오후4시~오전4시까지, 채탄능력에 대해서는 출탄 상자수를 덩어리, 가루로 구분하고, 또한 작업장의 난이도에 따라 1등부터 50등 까지 나누고 각각의 지불액을 산출하고 있다. 현재1인 평균채탄량은 다카시마에서는 2상자 이상,하시마에서는 4상자, 후타고지마에서는 2상자 이상이고 그 채탄임금으로 1인1일 평균 1엔87전 이상이다. 또한 다음 3종류의 상여방법이 정해졌다.
가. 당첨상여금 반 달 개근한자에 대해서는 채탄부5표, 잡역광부3표, 이하 3방휴3方休 까지 상여금을 지급하고, 추첨을 통해 1엔내지 5엔의 당첨금 지급. 당첨되지 못한 자에 대해서 1표당 50전을 교부함
나. 갱내상여 갱내계원은 매일 채탄부에 대해서 각 개인이 캐낼 탄의 예상량을 상자 숫자와 <대大>, <소小> 2종류를 지정하여, 그 <대>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1인 20전, <소>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10전을 지급.
다. 근로상여 반년간 임금총액의 2.5%를 여름휴가 및 연말에 지급하고, 또한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사에 적립해 두고 연6%의 이자를 더해, 해고를 할 경우 전액을 지불한다.
가족이 있는 광부에 대해서는 광부사택을 무료로 대여하고, 음료수,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각 호에 전등을 설치(전등료1개월 10전, 5촉광5전)。
독신자는 전부 탄광의 합숙소에 수용하고 식료로써 1인 1일 백미 1되(升), 반찬값4전5리를 지급하며, 별도로 민간업자의 숙소에 대해서는 그 가동 일수에 따라 정한대로 보조금을 지급함. 하시마의 경우는 면적이 적고 좁기 때문에 공사비5만엔을 투입하여 철근콘크리트 7층 건물 (외벽20m x 24m, 전 건평 1001평, 전호수 210호, 각호 8.2㎡-내지11㎡, 각호별로 취사장 있음)을 설비하고, 따로 같은 형태의 13층 건물을 건설중」
(나가사키 석탄의 집산集散 다이쇼7 나가사키상업회의소)
1919년<다이쇼8년> 11월 4일~8일(하시마) 채탄부170명, 1일평균 1엔70전에서 2엔50전으로 인상을 요구하여 태업
회사측이 평균2엔20전, 출탄상여금을 다카시마・후타고지마수준으로 제시하여 타결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19년<다이쇼8년> 12월(하시마) 충전공법에 의한 장벽식(長壁式) 채탄법(급경사 채탄법)을 실시
(미쓰비시광업사史 쇼와51.6.1 미쓰비시광업시멘트(주)
1925년<다이쇼14년> 12월 21일(하시마) 다이너마이트 사고 사망2명, 중상1명, 경상2명
오후1시,제4갱坑12척尺12편片 에서 바위를 자르며 갱도를 파는 작업중, 불발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것을 모르고 구멍에 철봉을 꽂았다가 폭발
<사망>철봉을 꽂았던광부 高倉太平(35) 다음날 아침 사망
  감독하기 위해 와 있던 토공인부 감독 大上今次(29) 즉사
<중상> 근처에 있던 광부 松岡亘(20) 중태
<경상> 근처에 있던 광부 田福吉太郎(26)경상 근처에 있던 광부 金松岩太郎(31) 경상
<원인> 동일 오전 11시, 공사감독 동 갱 제18호6계 제1실 丸山品吾(32)가, 田福, 金松를데리고 작업감독을 하면서 불발된 다이너마이트의 제거를 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5월 24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2
광부 강만영姜万栄(34) 경상북도=제30호 安藤三郎 씨 합숙소
광부 井上清助(33) 효고현=제30호安藤三郎 씨 합숙소
오후0시45분, 제5갱내 채탄중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7월 5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
광부 美之口喜四郎(29)=新見団二方씨 합숙소
오전1시20분, 제4 좌측4편 갱도 교차부분에서 갱도 천반天盤수리중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11월 15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 제2갱 사무소 사무원 山本瀧蔵(39)=사택22호
오후2시 반,제3갱의 메꾸는 작업을 지휘중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11월 25일(하시마) 자살 中川柳太郎(52)는, 사촌 山本瀧三의 낙반사고사를 비관, 정신착란, 목을 매 자살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11월 27일(하시마) 상해 <가해자>마부, <피해자>마부=전치2주, 마부 감독=전치1주의 부상
모자를 놀림 당해 면도칼로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7년<쇼와2년> 11월30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조선인 광부, 1개월중상
도끼로 허리를 일격 징역6개월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8년<쇼와3년> 1월 26일(하시마) 탄차사고 사망1, 부상1
살수부撒水夫 前田久蔵(40) 돗토리현=森岡씨 합숙소=사망
탄차승무원 平川奨(30)후쿠오카현=부상
탄차가 폭주, 平川는 탄차에서 떨어져 부상, 인사불성 
탄차는 지지대에 충돌, 낙반사고사, 前田사망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8년<쇼와3년> 1월 26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여자 때문에 쌍방 폭행, 5일간의 부상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8년<쇼와3년> 1월 26일(하시마) 갱외에서 탄차 사고 사망1
인부 田村寅太郎(46)=小森씨 집
제방 수리중, 위에서 탄차가 떨어져 즉사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9년<쇼와4년> 1월 5일(하시마) 갱내침수 사망자11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29년<쇼와4년> 1월 5일(하시마) 출수사고, 사망9 오전5시, 제4갱 제6편에서 갑자기 물이 불어나, 광부11명 행방불명
<사망>原田梅三=井西합숙소,中山합숙소=山口長市외 합9명
2명은 소생, 노오가타치쿠호直方筑豊광업소로부터 기사 이하 십 여명 응원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29년<쇼와4년> 3월(하시마) “미쓰비시의 다른 광산과 마찬가지로 직할과 세와카타世話方제도(세와가타제도: 합숙소에 담당자를 두어 광부의 출근 감독 및 도망 방지를 관리하게 하고, 가족구성, 인맥, 사상 관계 등에 대해 조사표를 만들게 해 노동자 대책의 기본으로 삼았다)의 병용하고 있지만, 하시마탄광 같은 경우는 주위 갱같은데는 돌래 1리(약3.9km)에도 달하지 않은 고도이고 따로 민가도 없고, 완정히 탄광 뿐인 섬으로 살풍경한 환경 때문에 광부의 고용,이입, 이동 방지에는 특별히 고심할 필요가 있는 상태이다””모집종업원 위탁모집의 한 방법 뿐으로1개월 100명이 안되는 광부를 모집, 고용하고 있다 (略)조선에 조선인 모집인이 수 명 존재하고 있다”
(광부고용상태에 관한 조사 1929년 후쿠오카지방 직업소개사무국 편)
1929년<쇼와4년> 5월 20일(하시마) 탈주하여 가불한 돈을 떼어먹는 상습범
전직 광부(24) 미나미쿠시야마촌南串山村(=小森사택)
1928.8小森사택의 가불한 돈을 떼어먹고, 그곳에서 1킬로 떨어진 하시마 북쪽 나카노시마에 헤엄쳐,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간 뒤 각지에서 상습적으로 가불금 떼어먹음
1929.5.20 나가사키시를 배회중 거동을 수상히 여겨 조사를 받음
(나가사키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일일신문사)
1929년<쇼와4년> 6월 16일(하시마) 살인 <가해자>광부, <피해자>공부계원, 즉사 구리코미繰込(작업분당) 문제에 인해 도께로
(나가사키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일일신문사)
1929년<쇼와4년> 6월 28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2
광부 朴全伊(35) 경상남도=安藤三郎씨 합숙소
광부 栗谷敦盛(24)=香川합숙소
(나가사키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일일신문사)
1929년<쇼와4년> 7월 28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중상, 작은 다툼에서 시작되어 도끼로 상해
(나가사키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0년<쇼와5년> 6월 21일(하시마) 탄차사고 사망1 운반부 庵下勇作(21) 가고시마현
정오, 제4갱 상방제구사上方除軌사갱에서 떨어져 즉사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0년<쇼와5년> 7월 24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광부 白木弘二(25)
오전 2시, 제4갱 우원편右元片, 갱입구로 부터600간間(약1.09km) 갱 아래에서 작업중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0년<쇼와5년> 8월 10일(하시마) 최초의 직영합숙소 완성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30년<쇼와5년> 11월 22일(하시마) 탄차사고 사망1 광부 모토카쓰明吾素且明吾(33)
오전 6시 40분, 제4갱내에서 탄차와 벽 사이에 끼어 사망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1년<쇼와6년> 1월 19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中西幾松(28) 오사카시,4갱 우측 사갱(卸) 굴진작업중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1년<쇼와6년> 3월 8일(하시마) 수갱 400척 높이에서 추락사
<사망>古賀岩夫(27) <중상>松本秀夫(27), 木下武久(24), 安竹佐吉(37)
<경상>樺島伊三郎(32), 岩切数夫(26)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1년<쇼와6년> 3월24일(하시마) 살인미수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전치 5주, 싸움을 하다 도끼로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쇼와8년<1933년>1월(하시마) <요정>「현회의원 本田伊勢松씨가 경영하는 요정 혼다야(本田屋)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석탄가루 투성이가 된 광부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것도 하시마탄광이 가진 하나의 푸근한 정경이다.」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3년 1월25일자
1933년<쇼와8년> 5월 22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3명, 중상1명
오전9시 반, 제4갱내 100간間(약182m)의 갱도에서
<사망>광부 川副新平(25), 藤吉三吉(26), 광부 除新救(28)
<중태>광부 渡辺光雄(35)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3년<쇼와8년> 7월 17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오전 0시 갱내채탄중 광부 深町作兵衛(35) 즉사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3년<쇼와8년> 9월24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2명 (전치 1주,10일), 술자리에서 말다툼하다 술병 휘둘러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4년<쇼와9년> 11월 26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광부 坂本鳩巣(22), 남부 제3편片에서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5년<쇼와10년> 1월 15일(하시마) 국방헌금 「하시마탄광 노무자」라는 익명으로 나가사키 헌병분견대 앞으로, 1엔과 함께 동봉된 편지
「저는 병역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1년간 매일 월1엔씩 국방헌금을 계속할 각오입니다」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5년<쇼와10년> 2월 7일(하시마) 제염공장사업 폐지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35년<쇼와10년> 3월 26일(하시마) 가스폭발, 자연발생한 불이 커져 가스에 인화, 사망자25명, 중경상자10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오후9시 반, 제4갱 우측 사갱(卸) 우반하右盤下 5방5方11척층11尺層 갱도目貫 상층上層에서 자연발화. 즉시 밀폐했으나 압착 때문에 가스가 충만, 제2차 폭발. 물을 넣어 진화. 제1차 폭발에서 조사를 위해 갱책임자 小川등 간부가 급파되어 응급 작업 중에 폭발. 사망3명, 중상18명, 경상6멸, 갱내 약200명은 무사피난
<구호>다카시마, 하시마 두 섬의 의사, 간호사, 하시마병원으로 
행방불명자 수용은 가스가 남아있어 불가능,가스중독사 가능성
<하시마>근대미가 넘치는 철근 콘크리트의 현대식 합숙소가 늘어서,멀리서 보면 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섬에 배를 대지 못한다.다카하마촌 高浜村의 재원은 전부 탄광이 부담하는 것과 마찬가지.
하시마인구 3136명, 탄광취업 1240명, 출탄(1933년)20,500t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035년 3월28일자
<합동 장례>4월 2일, 하시마 갱내 쇼와관
오전10시, 입항중의 선박에 조기게양. 후타고지마・하시마 두 탄광 작업중지, 합숙소별로 조기를 게양 

유족 및 각 관청, 관료, 지역단체, 회사 관계자 등 1000여명이 참배. 갱내의 시체7구는 4일중 수습 예정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쇼와10年4월3일자
<사망>飯島満(45), 大川仁三郎(24), 徐大順(36), 鶴田金徳(34) 구마모토,  向助市(39) 사가, 井上忠徳(28) 가고시마, 久木元東(25) 가고시마, 郭孝出(37) 강원도,  蘘汰陽(44) 경상남도, 張義守(23) 진주군, 徐応潤(43) 경상북도, 井出春蔵(41) 히라도,  黄渭奉(21) 경상남도, 茲之伊(43) 경상북도, 金甲徳(32) 경상남도, 郭五福(23) 강원도,  小川円蔵(48)부갱장副坑長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5년 3월 28일자, 3월 29일자, 4월 16일자
1935년<쇼와10년> 6월 상순(다카시마・하시마) 조선인광부350여 명 간의 친목회 계획
조선인상호의 친목도모와 일본의 지도(야학회)
(나가사키 신문 1922.10~1935.8 1945.3~1946.12 1959.1~) 1935년 6월 8일자
1936년<쇼와11년> 9월 9일(하시마) 대수갱 해저 2000척, 6년의 공사를 끝내고 완성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36년<쇼와11년> 10월 29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광부 西原万次郎(47)사가현 제12책(柵) 갱도 작업중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7년<쇼와12년> 5월 2일(하시마)  사고 사망1명 東川常雄(32)=신호담당, 케이지에 부딪혀 사망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7년<쇼와12년> 7월 1일(다카시마・하시마)  임금인상 광부 일률적으로 1할, 직원100엔 이하 1할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7년<쇼와12년> 11월 10일(하시마)  낙반사고 사망1명 山戸春光(21)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8년<쇼와13년> 6월 10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말다툼 끝에 신발(下駄)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8년<쇼와13년> 6월 12일(하시마)  사고 사망1명 갱외부 西節五郎(31) 갱목 절단중, 파편에 맞아 사망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8년<쇼와13년> 6월 19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1주의 상해, 곡괭이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8년<쇼와13년> 11월 24일(하시마)  도박 조선인 12명 체포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8년<쇼와13년> 12월(하시마)  가동률 저하대책으로써 「끝과 시작을 쉬지않는 모임」이라 칭하고,12월~1월의 2개월 개근자는 하코자키구箱崎宮 참배를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회원450명을 모았다. 개근93명(전 탄광에서2,000여 명)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9.2.5일자 
1939년<쇼와14년> 1월 22일, 29일(하시마)  헌신보국일
1월 22일, 29일(공휴)를 헌신보국일로 하여, 전 종업원 2,000여 명, 자발적 출근, 순익은 국방헌금
<결과> 약2600엔의 성과, 잡비를 뺀 2000엔을 육, 해군에1000엔씩 헌금. 이후로도 체력이 있는 한 계속하겠다고 약속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9.2.5일 자 
1939년<쇼와14년> 3월 2일(다카시마・하시마)  우메가사키梅香崎 경찰서, 무병 작부를 표창
「국민 체위体位 향상은 먼저 화류병 박멸부터」라며, 다카시마, 하시마 두 탄광지역의 작부들 중 화류병예방우량자 표창식 (1년간 무병작부) 하시마27명 중 12명, 다카시마49명 중 19명 나가사키시보다 양호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9.3.4일자 
1939년<쇼와14년> 3월 10일(하시마)  무운장구기원
종업원, 가족의 수양을 위해 꽃꽂이, 재봉, 시국담화회 등을 열어왔는데, 육군기념일 강연회, 출정병사의 무운장구기원
19일 유족위문연예회 각종 전람회, 폐품회수, 수양좌담회 등을 계획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39.3.1일자 
1939년<쇼와14년> 3월 10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중상 말다툼을 하다 곡괭이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9년<쇼와14년> 6월 13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작부, 중상 퇴짜를 맞자 도끼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39년<쇼와14년> 12월 상순(나가사키현내)  반도인 채용
노동력이 부족하여 내선융화를 명목으로 최근 반도인 이입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11월 하순부터 건실한 청년층을 차례로 내지로 도항시켜 오늘까지 1,500명, 호쿠쇼 탄전北松炭田, 사키토崎戸, 다카시마, 하시마로 배치, 나가사키 소개소의 알선으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39.12.9일자
스미토모 요시노우라住友芳浦, 닛테츠 코다日鉄神田, 예상을 뛰어넘는 호평
19일, 닛산 야타케日産矢岳 채용의 97명, 국민복 차림에 완장을 차고 도착
20일, 닛테츠 코다日鉄神田,두 번째로 57명 월말, 新中里坑, 100명예정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39.12.21일자 
1940년<쇼와15년> 2월 14일(정부)  상공성 증산계획안 결정 <목표>600만톤 증산, 탄가격 거치
<내용>➀증산장려금=증산 톤 당5엔, 7000만 톤 예정
   ②굴진掘進보조금=1m당 50엔(비용의 1/2~1/3에 상당), 2,000만 엔
   ③손실금 보조=적자 매탄売炭분6,000만 엔
   ④자재의 우선 배급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40.2.15일자
<추가예산>
   ➀증산장려금=증산 톤 당 2엔 또는4엔, 6000만톤예정
   ②굴진보조금=1940~1942의 3년계획, 1m당 35엔(비용의1/3에 상당)
   ③가격보조비=구입탄 톤 당 1엔 40전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40.3.5일자 
1940년<쇼와15년> 2월 16일 (정부)  요시다吉田 후생성장관, 석탄 재인식의 담화
「이제와서야 새삼 석탄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중략) 새삼 총후銃後 최전선의 투사로써 다시 인식하게 된 것이 탄광 종업원이다 (중략) 지금,광부들의 활약은 글자그대로 목숨을 건 노동이다. 실제 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중략) 전장의 병사들과 같은 각오로 근무해 달라. 물론, 광부도, 기술자도, 노무관리자도, 사업주도 모두 일심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18일(일) 밤6:45부터15분간,후생 라디오 방송『탄광종업원 제군에게 부탁한다』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40.2.18일자 
1940년<쇼와15년> 2월 (나가사키현 내)  현의 건강보험과, 회충구제,탄광노무자의 건강유지에 적극적인 대책
회충질환이 많이 발생해 결근율이 높으므로 2월 상순부터 노무자17,000명에 대해 변검사와 약처방을 실시하고, 재검사하여 3월상순까지는 철저히 구제할 계획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40.1.2일자 
1940년<쇼와15년> 6월 (정부)  호시노星野 기획원 총재,『쇼와14년도 물자동원계획의 실적』을 보고
천재지변과 제2차대전 발생으로 하반기에 대폭 개정, 2할의 공급감소 각 방면에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공급력을 낙관적으로 계산한 것도 원인.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종종 보이고 있다.
「석탄 및 전력의 부족으로 인한 영향 작년도에 있어서는 내지 및 사할린의 석탄생산에 버금가는 만주로부터의 석탄 공급이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은 것과 석탄 품질의 저하, 이상 가뭄에 의한 화력발전용석탄의 수요급증과 더불어 석탄의 일반적 부족이 겹쳐 전력부족 상태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국내전반의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생산계획에 차질을 빚었으므로 정부는 전력을 다해 석탄의 증산계획 강화에 임하여, 최근에는 점차 개선이 되고 있습니다」
(전사총서戦史叢書 ・ 육군군수동원 <2> 실시편 쇼와45 방위방위연수소 전사실편戦史室編 아사구모신문사朝雲新聞社 
1940년<쇼와15년> 9월 (정부)  보안강화책 상공성령 제68호 석탄갱용 폭약류 및 기계기구 단속규칙・
상공성령 제69호 석탄갱용 폭약류 및 기계기구 단속규칙을 제정
<이유>「지나사변의 발발에 따라, 전쟁수행을 위한 증산요청에 따라 광업은 능력이상의 생산을 강행하여, 난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데,광산에 있어서의 보안은 비교적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광산재해는 증가일로에 있다. 이것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요점>「상공대신이 지정한 석탄갱의 갱내에 있어서 사용하는 일정의 폭약류 및 기계기구는 석탄폭발예방시험소에서 실시하는 검정에 합격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
(광산보안년보(쇼와24년도판) 1951.8.13통상산업성 자원청 광산보안국) 
1940년<쇼와15년> 12월 8일(하시마)  신도臣道실천 자치위원회 결성
<목적>탄광의 익찬翼賛기관으로써 도나리구미(隣組) 제도에 의해 노무자간의 융화와 회사 노무자간의 상하소통의 성과를 얻는다.
<구성>전 노무자로 구성 위원은 직장의 중견인물, 아파트의 도나리구미 대표, 독신자 기숙사 사감 등
<운영>매월 제1일요일, 각 기숙사별 위원회, 수양・오락의 계획, 작업관련 연구
매월18일=전 섬의 위원회에서 익찬회, 직업지도소, 육해군, 학교로부터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1.3.1일자 
1941년<쇼와16년> 2월 7일(하시마)  나가사키 국민직업지도소의 농한기 증산부대
관내 니시소노기군西彼杵郡 44개 촌에서 각 마을 별로 농한기의 노동 권고협의회를 열어, 국가를 위해 출동하도록 열심히 권고한 결과, 7일, 제1반으로써 기키츠촌喜々津村 청년단 12명이 하시마로 출발 마을의 아소신사阿蘇神社에서「기키츠촌 청년단 대표로써 싸우거나 다투지 않고, 낭비하지 않으며, 1억이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석탄 증산에 매진할 것」을 맹세하고 출발. 3개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이어서 제2, 제3반 예정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1941.2.8일자 
1941년<쇼와16년> 2월 하순(하시마) 하시마 르포
➀석탄근로보국대
<효고갱兵庫坑 책임자>
「노무자 자신의 생활도 많이 변하여, 최근에는 옛날같은 야만적인 모습은 찾아보려해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물론, 이것은 오락시설의 완비, 대우 개선등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사변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12월 대정익찬大政翼賛 운동에 호응하여 노무자들의 신도臣道실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하부조직으로써의 자치적인 훈련, 인격의 단련을 시키고 있는데, 최근에는 태업이나 무단조퇴, 전직 등을 하는 사람도 적어져, 크게 효과를 올리고 있다. 아마 취로성적 등에 있어서는 일본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로봉사대 모기촌茂木村의 청년 山崎>
「비상시국에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병역의 의무가 없기에 석탄증산의 근로봉사대로써라도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기키츠촌喜々津村의 청년 向井>
「꼭 가도록 하라는 말씀을 촌장 어른과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들었기에」, 「말투는 다소거칠고, 석탄가루에 얼룩진 인상은 나빠서 처음에는 말을 걸지도 못했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모두 친절한 사람들 뿐이다. 기숙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번듯한 9층 건물이고, 부식도 좋고, 오락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농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문화 생활을 하고 있다」
②신도臣道실천 자치위원회 효고갱 책임자의 말
1940.12.8결성, 도나리구미(隣組)제도에 전원 가입, 월1회 회합, 따로 월1회 모임
③과거와 현재
<入江儀八>(시마바라島原 출신, 현 다카하마촌高浜村 마을 의원, 정부로부터 우수노동자로 표창)
「지금까지 천한 사회인이라 여겨지던 우리 노무자가 일반 사회인처럼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노무자에게 큰 희망을 주는 것이므로 모두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
<桜井金作>(히로시마시 출신)
「탄광노동자로써 일한지 벌써31년, 처음에는 다카시마에서 일했습니다만, 당시에는 임금도 싸서 48전에서 최고 90전 정도였고, 설비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아서 탄을 어깨에 지고 날랐습니다. 어깨는 아프고, 어떤 때는 일을 못한다고 동료에게 맞은게 한두번이 아니어서 울면서 지냈습니다. 이런 제재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감시인 모르게 나무술통을 몸에 달고 헤엄쳐 도망쳤지요. 그 후 하시마에 옮겨 벌써 18년이 되었는데 당시의 하시마도 아직 감옥같은 분위기여서 참혹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지요. 오늘날과 같은 하시마가 된 것은 20년 정도 전부터 회사가 노무자의 오락시설에 힘을 쏟으면서부터입니다. 그러나 비뚤어진 노무자의 마음을 진짜로 바로잡아 준 것은 사변의 힘입니다. 노무자도 역시 일본인이니까요」
桜井는 한 기숙사의 리더로써 지도방침에 대해 「우선 융화를 꾀하는 것이 첫째인데, 가족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융화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써는 도나리구미(隣組) 조직이 가장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중략) 역시 노무자 중에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으로 지도를 하면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인 만큼, 보통 사람보다 빨리 친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외에도 노무자들의 잦은 이직을 방지하기 위해 배우자들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섬에는 여성이 적어 생각대로만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安達治夫>(교토시 출신)
「나는 지금부터 5,6년 전에 사랑스런 처자를 버리고 입을 뛰쳐나와 각지의 탄광을 전전하며, 지금은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가끔은 역시 한 명의 아버지로써 고향에 남겨둔 처자를 떠올리곤 합니다. 최근에는 겨우 안정이 되었으므로 단촐하게나마 가족과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에 편지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고향인 교토에서는 탄광을 옛날과 변함없이 감옥 같은 곳이라 생각하고 있는지 탄광 노무자를 벌레보듯하여 가족까지 무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면 차마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바람은 일반 사회인들이 좀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을 보아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로부터 이런 제재를 받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격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 첫째라 보고, 그 방법으로써 품위있는 취미를 가지려고 하여 저의 기숙사에서는 꽃꽂이, 차도, 노래 등 고상한 것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의해 우리 생활도 분명 윤택해 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1.2.28일자~3.2일자
1941년<쇼와16년> 4월 8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공무담당 기수, <피해자>노무계원, 말다툼을 하다 칼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1년<쇼와16년> 6월 18일(하시마)  나가사키시의 각 상업노동조합, 18일 스와諏訪신사에서 보국대 결성식
물자부족으로 두부가게 3일에 한번 영업, 과자가게 1일1시간 영업, 과자, 쌀, 술, 두부, 식품 점 등 약 100명의 희망자 결정 20일 하시마로.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1.6.12일자 
1941년<쇼와16년> 6월(하시마)  보국대 나가사키시내 중소상공업자 중 희망자 68명으로 석탄증산 근로보국대를 조직, 하시마에 보내 4개반으로 나눠 10일씩 취로. 9월 90일을 맞아 노무자, 집단전업으로 주목 일당2엔50전 정도 중소상공업자의 남는 노동력을 생산부문으로 돌리는 것은 상인 중 육체노동의 무경험, 교대제라는 문제가 있어서 쉽게 운영하기 힘든 면도 있다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1.9.2일자 
1941년<쇼와16년> 7월 하순  반도노무자 잔류하도록 노력. 현은 탄광과 연단위 계약을 한 집단모집 반도노무자를 정착시키기 위해 현의 협화회를 통해 각 경찰서, 각 광산사업자에게 재계약장려를 지시. 우대하여 증산노력
(나가사키 민우民友신문 1940.2~1959.1.13 나가사키 민우民友신문사) 
1941년<쇼와16년> 9월 19일(하시마)  상해 <가해자>광부, <피해자>광부, 경상 놀림받아 도끼로
(나가사키 민우民友신문 1940.2~1959.1.13 나가사키 민우民友신문사) 
1941년<쇼와16년> 12월 8일(다카시마・하시마)  1일분 임금 약 1만엔을 전액 육해군에 헌납. 월 수입 1인 평균150엔
쇼와16.4~9(반년)의 후쿠오카 감독국 출탄경쟁 1위, 출근율92%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2.1.17일자 
1942년<쇼와17년> 2월 상순(정부  상공・농림성,「광산에 대한 물자배급조치」
광산종업원의 생활필수품 배급을 원활시하여 증산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➀업무용 타올, 작업화, 삽 등 작업용품은 구매회에서 배급
②미소, 간장 등 생활 필수품의 경우, 사택거주자는 구매회로부터, 그 외에는 지뱅 소매상으로 부터
③감독국, 지방청에서 감독(가격, 배급상태 등)
(나가사키 일일신문 1911.4~1958.12 나가사키 일일신문사) 1942.2.7일자 
1942년<쇼와17년> 5월(하시마)  후생성 장관 표창(전국11명) 掘進夫, 土崎良雄(35) 시마바라島原에서 7년전 입갱入坑
「지금은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 생각하면 괜찮습니다. 전장에 있는 군인들의 기분이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천공기로 구멍을 뚫는데서 석탄 증산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일터에 보람을 느낄 수 있어 기쁩니다」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2.8.22일자 
1942년<쇼와17년> 6월 29일(하시마)  추락사고 사망1명 광부 斉藤清太(20)
오후10시, 통풍구 확장 작업중, 줄사다리가 끊어져35미터 아래 바닥으로 추락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2.7.1일자 
1942년<쇼와17년> 8월 7일(나가사키현 내)  징용응모공원工員대책 현県의 노정과労政課, 7~13일, 이사하야시諫早市 다이유지大雄寺에 수련시설을 설치
대책이 늦어지고 있는 중소사업장의 책임자, 기숙사 사감을 초대하여 공장반・광산반으로 나누어, 각각 2박3일의 수련. 징용 응모공원의 지도방법을 중심으로 ➀각 사업장의 상황, ②국민징용령 시행후의 변화와 장래의 대책, ③종업원의 지도와 위생관리
「징용 응모공원의 모두가 전직자, 이직자인 관계상 일에 미숙하여 선배 및 사업주가 냉대한다는 소문을 감안해 생각해보건대, 현노정과県労政課에서는 “이 징용응모 공원은 사업주와의 고용관계가 아니라, 증산의 중요성 때문에 국가로 부터 일시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특수관계에 있는 노무자이므로 냉대하는 사실이 판명될 경우 엄중 처벌할 방침」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2.8.7일자 
1942년<쇼와17년> 10월 말일(하시마)  개근운동 8~10월의 3개월 개근 갱내7명, 갱외24명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2.11.8일자 
1942년<쇼와17년> 11월 중순  반도인교화 아이노우라相浦 경찰서 계획 산보産報・협화회주최로 스모대회, 우승기 쟁탈전
11.28~29 각 탄광의 반도인 노무자 격려 위안을 위해 협화회 주최로
마술, 곡예, 영화 등의 위문대 순회. 정취와 흥미를 돋구는 교화수양을 실시하다.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쇼와17.10.30일자 
1943년<쇼와18년> 8월(정부)  광사鉱士 제도 상공성, 8월 실시하는 후쿠오카 감독국의 제도를 전국에 적용
➀광사는 광원이라 부르고, 근면성실, 품행방정, 기술 우수한 자는 감독국장이 광사 칭호 부여
②광사는, 1급광사(동일 탄광에서 갱내10년이상, 갱외15년이상 근속)
     2급광사(동일 탄광에서 갱내5년이상, 갱외8년이상 근속)
     3급광사(동일 탄광에서 갱내2년이상, 갱외3년이상 근속)
각가 좌측팔에 산 모양의 노란휘장을 1급 3개, 2급 2개, 3급 1개 착용하고, 광원은 광사에게,
광사는 상급자에게 군대식 경례. 선고는4월, 10월
③퇴사, 무단결근 14일 이상은 벌금이상의 처벌
 근무성적불량, 그 외 불량한 행위, 또는 명예를 훼손했을 때는 칭호박탈
④광사수당 1급 월10엔, 2급 7엔, 3급 5엔
 주택 외 복리시설은 우선적으로 이용가능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3.8.19일자
1943년<쇼와18년> 10월 10일  아키바秋葉 현県경찰부장,10.10~13 호쿠쇼北松 각 탄광10군데 시찰
「내지인 노무자도, 반도인 노무자도 진지하게 이기기 위해서 한 덩어리라도 많은 석탄을 캐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특히 반도 노무자는 모두 표창할 만한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2~3의 예외는 있었다). 감독자가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노무관리에 임하고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권력으로 억압하는 곳은 일시적으로 능률이 오른다 할지라도 점점 쇠퇴하고 있다. 이 상태로 보건대 역시 노무관리는 이 인간적 정신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다음에는 일반 현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인데, 갱내 노무자에게는 역시 배급이외의 식량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노무자의 과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식량이 선결문제이다. 그래서, 익찬翼賛 운동, 산보産報 운동에 있어서도 앞으로는 이 점에 유의해주것을 당부하겠지만, 일반 현민도 서로 절약하며 이기기 위해 갱내노무자에게 식량을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주기 바란다」
(나가사키 일보 1942.5~1944.8 나가사키 일보사) 1943.11.14일자 
1943년<쇼와18년> 11월(정부)  군수성 설치
이로 인해 상공성 폐지, 광산보안행정은 군수성 비철금속국 및 연료국이 관할하게 되었다.
(광산보안년보(쇼와24년도판) 1951.8.13 통상산업성 자원청 광산보안국) 
1944년<쇼와19년> 7월 12일(하시마)  가스분출, 사망5명 2:00 하시마 탄광 제5번 하좌 6크로스에서 발생
(광산보안년보(쇼와24년도판) 1951.8.13 통상산업성 자원청 광산보안국)
가스분출 사망자5명
(치쿠호 석탄광업사 연표 1973.11.30 동 편찬위원회 서일본문화협회) 
1945년<쇼와20년> 7월 31일(다카시마,하시마)  중앙발전소피폭, 전 탄광 조업중지 12상순 복구
(다카시마쵸문화史 쇼와24 松尾兼治편 다카시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