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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역사 연구 제22호 발췌 인쇄물 2007년 3월
규슈대학 기록자료관 산업경제 자료 부문 편집 및 발행(구 석탄연구 자료센터)
【자료소개】
‘<타향의 탄광-미쓰이 야마노 (三井山野탄광 강제노동의 기록->을 읽고-거짓과 날조, 오문을 배제한다-’
미쓰이 야마노 채광 담당:사이 요이치(佐井洋一)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해설: 미와 무네히로(三輪崇(원문 그대로 게재)弘)
해설:‘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유고’
미와 무네히로(三輪宗弘)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씨가 집필한 유고 ‘<타향의 탄광-미쓰이 야마노 탄광 강제노동의 기록->을 읽고-거짓과 날조, 오문, 전문을 배제한다-’는 2000년에 논픽션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 씨와 다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씨의 청취 기록을 중심으로 편집된 <타향의 탄광-미쓰이 야마노 탄광 강제노동의 기록>이 간행된 후 ‘미쓰이 야마노 탄광 근무자이자 탄광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자로서 이런 책이 진실한 탄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상에, 아니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겠다’, ‘이렇게 편향된 책을 보면, 전쟁 시 탄광, 특히 미쓰이 야마노 탄광은 이렇게 심한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일단 출판되면 모르는 사람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진실한 탄광의 실태’를 남기겠다는 분명한 의도에 따라 쓴 것이다. 사이 요이치(佐井洋一) 씨가 좌담회 사회를 맡은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씨와 사이 요이치(佐井洋一) 씨를 중심으로 ‘석탄 산업 자료조사 연구회’가 출범되었고, ‘경험자가 올바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이야기도 가장 힘이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반도인, 화공(중국인 노동자), 포로를 부린 경험자를 가능한 한 많이 모아’ 허위가 아닌 진실을 밝히겠다는 신념으로 진실 규명에 나섰다. 이 유고는 그 성과물이다. ‘1, 머리말’과 ‘이로하니호헤토’ 속에는 언론의 탄광 보도가 끼친 영향과 그 결과 일반인들에게 유포된 탄광의 이미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폐쇄되어 폐허가 된 탄광 주택’과 ‘나이 들어 재취업이 어려운 실업자들’이 방영되었으나 어떤 특정한 일부분만 보고 탄광 사회 전체를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으로 보도한 언론의 강한 영향력에 대해 아토베 씨는 ‘새삼 끔찍하게 느껴졌고’, 인정미 넘치는 탄광사회에서 자란 탄광 일꾼으로서 본인의 이미지와 격차가 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도처에 탄광 관계자들이 흩어져 사는 가운데 6명의 관계자가 모여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 좌담회 사회를 맡은 사람이 3년간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사이 요이치(佐井洋一) 씨이다. 안타깝게도 이 ‘좌담회’의 기록과 테이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유고를 통해 좌담회 내용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 좌담회에서 조선인은 자유롭게 행동했다는 지적이 나온 듯하다. ‘탄광 경험도 없고, 갱내 노동의 실태나 전쟁 중 반도인, 화공, 포로의 실태도 모를 터인’ 다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씨와 하야시(林) 에이다이 씨가 기술한 <타향의 탄광>의 내용과 자의적인 사진 해설에 대한 의문 및 모순점을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드러내며 ‘거짓과 날조, 오문(잘못 들은 이야기), 전문(전해 들은 이야기)’을 지적했다. 우에노 에이신(上野英信)과 조근재(趙根在) 감수 <사진만엽집, 치쿠호(筑豊)2 위대한 불(상)>(1984년, 아시 서방(葦書房)), 하야시 에이다이(사진, 글)와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해설) ‘청산되지 않은 쇼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1990년, 이와나미 서점) 등 이른바 강제연행 서적의 관용구이자 상투적 문구인 ‘노동강화’, ‘위험한 작업은 조선인’, ‘하루가 멀다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다음 날 아침까지 일했다’, ‘조선인 도주’, ‘강제연행’에 대한 반론이 침착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반도인 합숙소 설계도에 ‘도주 방지용’이라 기재된 것을 하야시 에이다이는 기고만장하며 선전했지만, 일본인 독신자용 합숙소에도 동일하게 경계용 판자 울타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선입견에 따라 어떤 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 설계도의 입수 경위에 관한 다케토미 씨의 기술에는 사실과 다른 기재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전국 각지의 탄광 주택 설계도와 도면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지적이 맞는지, 아니면 아토베 요시오 씨의 유고 기술이 맞는지는 연구가 진전되면 조만간에 결착이 날 것이다. 유고에는 반도인 합숙소와 내지인 독신 합숙소의 경우 ‘거의 똑같은 설비’였다고 명기되어 있다.
또 존 백스터(John Baxter)의 <NOT MUCH OF A PICNIC 대단한 피크닉은 아니었다, 징집병:일본 전쟁포로의 회고록>(아카마 마사히사(赤間正久) 번역, 1997년)에 나오는 미쓰이 야마노 탄광 공작과 시절의 회상과 관련된 거짓, 오문, 전문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현장 측의 반론은 전기 수리공장에 배치된 포로의 그럴싸한 기술을 쉽사리 논파한다. 갱내 경험이 없는 포로의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기술은 현장에 정통한 채광 담당자 관점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당시의 현장을 알고 있는 우리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사실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고 말하고,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고 매듭지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시 상황을 평화로운 평시의 시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명언 등 사실을 추구하는 자세도 그렇고, 눈꼴사나운 왜곡과 날조에 대한 반박이 박진감을 자아낸다. 아토베 씨의 기백 넘치는 문장에서는 호소하고 싶은 내용이 몽골 솟아오른다. 많은 독자이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씨의 유고를 차분히 읽고 허위가 아닌 탄광의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본문에도 쓰여 있듯, 아토베 씨는 1965년 야마노 탄광 가스폭발 사고 피해를 보아 입원했지만, ‘사고라는 것은 인간의 맹점을 찌르고 일어나는 법이다’라고 회술 했다. 입원 시 친구와 나눈 대화는 본문을 읽어주기 바란다.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씨는 광산 폐쇄 후인 1972년 미쓰이 광산 견갱터널굴착(주)에 근무했다. 말년에는 이나쓰키마치사(稲築町史) 편찬위원을 지냈고, 2004년 7월에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타니 마사유키(佐谷正幸) <탄광의 진실과 영광, 조선인 강제연행의 허구>(2004년 일본회의 후쿠오카 치쿠호(筑豊) 지부)에 아토베 씨 유고가 게재되었다. 이를 읽고 꼭 <에너지사 연구>에 전문을 게재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차남인 아토베 오사무(跡部治) 씨의 양해를 구해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애써 주신 사타니(佐谷) 씨, 흔쾌히 허락해 주신 아토베 오사무(跡部治) 씨게 깊은 감사 말씀 드린다. 좌담회 기록이 발견되면 다음 호에서 게재하고자 한다.
최근에 어떤 재일조선인 문제 연구자가 내게 전쟁 중인 1943년, 1944년, 1945년의 재판기록을 보내왔는데, 집행유예 중인 조선인 노동자가 다시 범죄(절도, 도둑질)를 저질러 강제송환한다는 내용의 판결자료였다. 집행유예중인 조선인 노동자가 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해설에서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통설에 따르면 노무 동원은 크게 나누어 ‘자유 모집’, ‘관 알선’, ‘징용’이 있었으며, 법적 강제력이 있는 징용이 이루어진 것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일이었다. 이른바 조선인 강제연행설은 정의를 명확히 내린 후에 논의하지 않으면 공허한 정치 슬로건이나 정치단체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욕구불만인 학자나 시야가 좁은 연구자의 보잘 것 없는 정의감의 배출구로 이용될 뿐일 것이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노동자가 부족했고, 토목작업원이나 농번기 농업노동력도 부족했다. 이러한 노동시장이 있었기에 노무 동원의 두 배나 될 정도로 자유 도항 자와 밀항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1996년도의 검정을 받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기술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복사본을 입수해 읽어 보았는데, 편향 차원이 아니라 날조 그 자체였다.
해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한 마리의 개가 공연히 짖으면, 다른 개들도 덩달아 짖는다.’
-덧붙임-
명백한 한자변환 오류나 입력 오류는 정정했다. 구두점도 일부 보충하고 줄 바꾸기도 추가했으며, 표제어에 한문 숫자를 붙였다. 인용문 오류는 원전과 대조해 수정했다. 사진과 좌담회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고의 제목이 ‘<타향의 탄광>을 읽고. 허위가 아닌 “이것이 진실한 탄광이다” 거짓과 날조, 오문, 전문을 배제한다. 전 탄광 일꾼은 말한다’처럼 길기 때문에 표제처럼 바꾸었다.
‘<타향의 탄광-미쓰이 야마노 탄광 강제노동의 기록->을 읽고-거짓과 날조, 오문을 배제한다-’
미쓰이 야마노 채광 담당:사이 요이치(佐井洋一)
아토베 요시오(跡部義夫)
1. 머리말
‘진실한 탄광’의 실태를 기록에 남기려고 판단한 경위
일본이 전쟁에 패한지 벌써 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초토화된 땅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나 지금은 개인소득 면에서 세계 1위, 국민총생산 면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지나온 여정을 살펴보면, 메이지 유신을 거쳐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1등 국으로 약진했을 당시의 2차 대전전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만 근대국가로서 식민지가 되지 않고, 반세기 내에 열강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한 약진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일본민족이 오랫동안 쌓아온 국민성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된다. 과거 반세기를 되돌아보면, 1960년이 큰 전환점이었다고 여겨진다. 정치의 중심부에서는 안보투쟁이 일어났고, 국회 주변은 혁명전야처럼 어수선했다. 한편 경제계에서는 총자본 대 총노동의 결전이라 불린 미이케탄광쟁의가 정점에 달한 해였다. 일교조도 전성시대를 누렸다. 이를 메이지 유신과 비교하면 에도막부의 대정봉환(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 사건)이 유신성공의 전환점이었던 것처럼, 1960년은 보수 대 혁신의 대결,
총결산의 해이자, 안보투쟁이나 미이케탄광쟁의도 그렇듯 좌익이 다 패배해 일본의 장래가 결정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모든 산업은 생산성 향상을 추구했고, 당시 탄광노동조합과 함께 최강을 자랑했던 일본관공청 노동조합 협의회도 순차적으로 분할 및 민영화가 진행되어, 일반 국민들도 국철 시대와 민영화 후의 JR을 비교해 어느 쪽이 제대로 된 진정한 인간사회였는지 굳이 소련의 붕괴를 들먹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좌익사상이 완패한 것이다. 전신, 전화, 담배도 민영화되었다. 민간에서는 자동차, 전기제품, 공작기계 등 일본의 전통적인 ‘장인’정신이 뒷받침된 우수한 기술이 세계를 압도했고, 독보적인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주장처럼 ‘걸프전에서 사용된 미국의 놀랄만한 첨단무기도 일본 부품이 없었더라면……’하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우리 일본인들은 뽐낼 필요는 없겠지만, 자신감과 긍지는 가져야 한다. 한편 광산을 살펴보면, 미이케쟁의가 발생하기 조금 전부터 일본 석탄산은 에너지혁명(고체 석탄에서 유체 석유로의 전환) 앞에서 잇따른 폐쇄의 시련을 겪었다. 석탄 갱내채굴 분야에서 지금 세계 1위의 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의 탄광도 현재 나가사키현 이케시마 탄광과 홋카이도 태평양 탄광 두 개만 남아 있으며, 석탄으로 번성한 이나쓰키마치(稲築町)도 야마노 탄광의 폐쇄(1973년)를 끝으로 이제 탄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전성기에는 4만 6천명의 인구를 자랑했고, 중앙자본인 미쓰이, 미쓰비시, 닛테츠와 일본 탄업의 각 탄광이 존재했으며, 철도역은 자그마한 이나쓰키마치(稲築町)에 야마노(山野), 아카사카(赤坂=시모카모오(下鴨生)), 카모오(鴨生), 우루시오(漆生) 네 개나 돼 정말 활력 넘치는 고장이었다. 하지만 흥망성쇠는 세상사의 순리인지라, 기원정사(祇園精舎)의 종소리처럼 흥성의 극치를 이룬 이나쓰키마치(稲築町)의 탄광도 에너지혁명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고, 1955년경부터 순차적으로 합리화, 제2회사화, 경영 이전 등이 추진되었고, 1973년에는 마지막 탄광이었던 야마노 탄광도 폐쇄되어 마을에서 완전히 탄광의 불빛은 꺼지고 말았다. 그사이 꽤 많은 동료가 도쿄, 오사카, 고베 방면에 재취업했지만, 끝까지 탄광과 운명을 함께하며 남았던 우리가 몹시 분해한 사실이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탄광 시절의 느낌과 일반인들의 탄광에 관한 이미지가 정반대라는 점이다. 탄광이 잇달아 폐쇄되어 종업원들도 당연히 일자리를 잃고 재취업자가 증가해 기다란 연립주택은 이 빠진 듯 빈집이 늘고 사택의 활기가 사라져서 분명 뉴스의 가치는 있었을 것이다. 1965년 이후 TV는 광산이 폐쇄돼서 폐허가 된 탄광 주택이나 나이 들어 재취업이 어려운 실업자들의 상황만 방영했고, 야마모토 사쿠베(山本作兵衛)의 탄광 그림이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폭발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그림은 탄광의 역사 면에서 분명 가치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석탄채굴 초기, 즉 메이지, 다이쇼, 쇼와 초기와 관련된 소형 탄광 그림이다. 특히 남자는 알몸에 들보 하나만 걸친 채 얇은 석탄층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곡괭이를 휘두르며 석탄을 캐고 있으며, 여자는 무지기 하나만 걸치고 수라(석탄을 싣는 작은 나무통)를 끌고 있으며, 등불은 휴대용 석유등 하나만 켜진 것이 유명한데, 일반인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 탄광일은 지하의 어두운 곳에서 더럽고 위험하며 힘든 작업을 하는 최악의 직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다. 모든 언론이 그렇게 보도하니까 말이다. 또 1975년 무렵에는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 학대, 도주 문제가 책에서 다루어지거나 사진집으로 출판되었고, 종군위안부 문제마저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박차를 가했다. 탄광의 이미지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우리처럼 대형 탄광(미쓰이먀아노 탄광)에서 일한 이들은 ‘탄광만큼 생활이 편하고, 정이 깊고, 각지에서 모여든 집단이라 해방감이 느껴지고, 차별의식이 없으며, 교육 수준도 지역사회에서 한수 두수 위였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언론의 잘못된 보도 탓에 일반사회는 ‘탄광’ 하면 ‘어둡다, 위험하다, 더럽다, 강제노동, 폭력, 빈곤,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만 떠올린다. 우리는 그러한 보도가 이루어지고,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한 서적이 출판될 때마다 진실한 탄광의 실태와 격차가 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하니호헤토(가나다라마바사)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 후배 T 군의 장남은 야마구치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오사카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는데, 6학년생 손녀가 학교에서 동화(피차별 부락) 교육을 받고 ‘이로하니호헤토’라는 제목으로 예순 넘은 할머니의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동화지구 출신이라서 집이 가난해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탄광에서 일하고, 탄광이 폐쇄될 때까지 석탄 줍기나 선탄장 일을 해 글씨를 전혀 쓰지 못했다. 오사카로 나와 ‘글 배우기 학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글자를 배워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제목인 ‘이로하니호헤토’로, 주제는 ‘동화지구 출신자는 차별을 받아 학교에도 못 다녔다’, ‘탄광이라는 곳은 그렇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도 일할 수 있는 곳이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강연회가 끝난 후 선생님이 “여러분 할아버지, 할머니 중에 탄광에서 일하셨던 분 계세요?”하고 묻자, 손을 든 학생은 손녀 혼자였다고 한다. 여름방학 때 손녀가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아버지가 가끔 영어를 쓰니까 “할아버지는 영어도 할 수 있으세요?”하고 손녀가 묻길래,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하고 의아해하자, ‘이로하니호헤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손녀 자신은 탄광이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야마구치대학을 나온 아들은 탄광에서 자라 탄광 사택에 살며 대학에 다녔으니 어느 정도 탄광에 대해 알고 있지만,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손녀도 자주 고향에 내려오지만, 할아버지 집이 탄광 사택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다. T 군도 나처럼 일반적인 탄광의 이미지에 분해하는 부류에 속해 있어서 “다음에 할아버지가 오사카에 가면 선생님께 오시라고 해라. 할아버지가 진짜 탄광 얘기를 해드릴테니까.”라고 손녀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사카에 갔을 때 선생님을 불렀다고 한다. 물론 야마모토 사쿠베(山本作兵衛)의 탄광 그림 이야기책과 탄광 갱내, 갱외 사진 등 보유한 자료를 다 지참했다고 한다. 먼저 “선생님, 제가 지금 사는 집은 탄광 시절에 살았던 사택을 그대로 싼 가격에 넘겨받은 것인데(야마노 탄광 폐쇄 시 전 종업원에게 매각) 넓이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대답은 안 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 밖에 안 가진 선생님은 TV에서 방영된 다 쓰러져가는 폐허 상태의 기다란 연립주택을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가 100평이고, 집은 40평이에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100평짜리 토지는 그대로 있으며, 집은 회사가 새로 바뀔 때 재건축했지만 넘겨받은 당시의 사택이 31.5평이었어요. 이웃집들도 다 그 정도 크기였죠. 물론 저희 사택은 직원 사택이라 넓지만, 광부 사택의 경우에도 토지는 20이나 30평 이상 돼요. 저는 미쓰이 광산 야마노 광업소에서 광산이 폐쇄될 때까지 근무했는데, 미쓰이 광산은 홋카이도에 3개, 규슈에 3개의 큰 탄광을 소유했습니다. 규슈의 세 산중 야마노가 가장 작은데, 미쓰이 타가와 탄광이 야마노의 2배, 미쓰이 미이케탄광이 타가와의 2배, 즉 미이케는 야마노의 4배 이상의 규모를 가진 탄광으로, 일본에서 제일 큰 탄광입니다. 오무타(大牟田)시는 미쓰이 미이케의 본거지 도시이었다는 사실은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야마노는 규슈의 미쓰이 계통 탄광 중 규모가 제일 작아도 치쿠호(筑豊) 탄전 유수의 탄광으로, 전성기는 8천명의 종업원이 있었습니다. ‘이로하니호헤토’ 강연을 한 할머니의 예처럼, 2차 대전전부터 일본의 의무교육 보급률은 100%에 가까워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던 사실은 선생님도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나쓰키마치(稲築町)에도 동화지구 출신자들이 있는데, 거의 모두 의무교육은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생활하기 편한 탄광 지대에서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낸다는 건 부모가 보통 이상한 게 아니죠. 이건 동화지구라든가 차별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부터 탄광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고 해서 전국 각지에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탄광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탄광의 기다란 연립주택 생활은 정말 해방감이 들고, 이웃집과도 친척같이 지냈으며, 차별의식 등도 거의 없었습니다. 부락출신자라도 우수한 사람은 척척 직원으로 승진했고요(2차 대전전 미쓰이 탄광에서는 직원을 관리라 부름). 저희는 담당자 회의 후 회식 자리에서 부락 출신 담당자들과도 서로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탄광에는 차별의식이 없었습니다.
또 제가 살았던 지역은 에다사카(枝坂)의 직원 사택이라 불리었는데, 이나쓰키마치(稲築町) 내에서도 교육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한 단계 위인 엘리트집단 주택지였습니다. 야마노 탄광에는 옛 제국대학 출신자가 기술계, 사무계에 각각 한 사람씩 꼭 입사했고, 거기에 사립대 출신자, 옛 고등전문학교 졸업자와 실업학교 출신자들이 많이 있었으니……(현재의 대학진학률보다 2차 대전전 구제 중등학교 진학률이 훨씬 낮았음).
종전 전후에는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탄광에 재취업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 정도입니다. 선생님들은 부정적인 정보밖에 모르기 때문에 진실한 탄광의 실태를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지만, 야마모토 사쿠베(山本作兵衛)의 유명한 탄광 그림은 메이지, 다이쇼, 쇼와 초기의 소형 탄광 그림으로, 저희가 미쓰이 야마노 에 입사해 폐쇄 시까지 일한 탄광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어요(이때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제1입갱로, 입갱 정원, 갱내 전철, 갱도의 뼈대 설치상황, 채광현장의 수압철주, 컨베이어 등의 사진 제시). 갱내 상황은 사진에 나온 대로인데, 1945년대 후반의 대학생 입사희망 순위를 살펴보면 몇 년동안 미쓰이 광산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미쓰이 야마노 육상부는 일본제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 육상부였습니다. 특히 마라톤의 경우, 코가 신조(古賀新三)라는 당시 압도적 1위의 선수가 있었고, 올림픽 마라톤 선수도 배출했을 정도입니다. 문화활동도 활발해 매월 두 번 신문이 발행되어 전 가정에 배포되었고, 각종 취미모임도 활발했습니다. 전사적으로는 매년 산신사 축제, 전산대항 대운동회, 봉오도리 민속춤대회, 불꽃놀이 등을 개최했으며, 회사 직영 영화관도 있었습니다. 생활면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사택 집세, 수도요금, 광열비가 다 무료였다는 점이죠. 탄광생활이 편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형 탄광은 군대로 치면 사단이나 군단 같아서 다 스스로 조달하는 조직을 보유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쓰이 야마노 병원은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소아과 진료과목을 가진 종합병원이었구요.
탄광이라 하면 ‘이로하니호헤토’의 예처럼, 일반인들과 비교해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수준높은 사람들이 많고, 기술계 직원이 되려면 우선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됩니다. 특히 광장이나 보안감독원이 되려면 갑종상급 보안기술 직원시험에 합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과목은 (1)광산보안법규, (2)갱내보안, (3)갱외보안, (4)전기보안, (5)기계보안, (6)방폭보안, (7)광해보안 7과목이 있으며, 수험 후 3년 이내에 전 과목을 통과하면 됩니다. 광산 폐쇄 후 건설회사가 설립되어 저는 그대로 그 회사에 들어가 필요한 국가시험을 차례차례 통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급 건축사, 1급 토목시공 관리기사, 제2종 하수도 기술자 등인데,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갑종 상급 보안기술 직원시험이었습니다. 합격률이 5% 내외였으니까요. 그 정도로 탄광 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수준 낮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었어요……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 “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역시 직접 경험하시고 실정에 밝은 분의 말씀을 들어봐야 하겠군요.”하고 몇 번이나 전했다고 T군이 말했는데, 그도 평소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장남이 가고시마대학을 다녀서 가고시마에 사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아버지가 국철 직원이어서 관사에 살고 있었다. 약속이 정해져서 우리 부부는 가고시마 관사까지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우선 집이 너무 비좁아 깜짝 놀랐다. 탄광 직원 사택 중에 그렇게 비좁은 집은 없었다. 사돈은 “아버님이 탄광에서 일하신다고 하길래 실례되지만, 신원조사를 했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보도되니 좀 걱정이 되어서요.”라고 말했다. 후일 며느리와 사돈 셋이서 답례차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맨 먼저 “이게 탄광 사택인가요? 넓네요.”하고 깜짝 놀라고, 야마노 탄광 제1, 제2입갱을 견학했는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탄광의 이미지와 전혀 달라 “탄광이 이런 곳이군요.”하며 계속 감탄했던 점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다.
이상, 탄광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과……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TV와 언론 보도 그 자체인데……실제로 탄광에서 생활한 자와의 180도 다른 인상의 예를 들었는데, 실로 언론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새삼 끔찍하다고 느껴진다.
<타향의 탄광,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강제노동 기록>
‘이로하니호헤토’에서 언급했듯, 탄광폐쇄가 잇달았을 무렵 언론과 TV가 어두운 면만 강조한 보도는 탄광의 실태와는 다른 부정적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심어 놓았다. 또 우에노 에이신(上野英信),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 하야시 에이다이 씨가 출판한 탄광 관련 사진집이나 강제연행, 강제노동 보고서는 이에 박차를 가했다. 탄광에서 실제로 일한 우리 같은 자들은 “아냐!! 그렇지 않아!!”하고 비분강개하면서도 이를 정정할 수단조차 갖지 못 한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올해(2000년)에 접어들어 (<타향의 탄광,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강제노동 기록>, 이하 줄여 <타향의 탄광>이라 칭함)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편집인은 다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하야시 에이다이이며, 띠지에는 ‘최초 공개! 수용소 설계도가 말하는 전시 하의 탄광’이라 적혀 있고, 설명문에는
‘중국, 한반도의 국가 전체가 관여한 노동자 사냥, 탄광의 가혹한 강제노동, 학대, 도망, 학살, 그리고 패전……갱내 담당자, 특별고등경찰, 포로들의 생생한 증언, 수기, 나아가 소각 처분되었을 터인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수용소 설계도가 전시 하의 탄광 실태를 밝힌다’
라는 선풍적인 글귀가 눈에 띈다. ‘미쓰이 야마노 탄광 강제노동 기록’이라 되어 있어 전에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 근무한 적이 있는 자로서 큰 흥미를 느끼고 즉시 구매해 단숨에 독파했다. 내용의 핵심은 전시 중 조선인, 화공(중국인 노동자), 포로의 이른바 강제연행, 강제노동 실태에 관해 당시의 관계자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하야시 에이다이 씨가 문장으로 엮은 것이다.
증언 11편(하야시 에이다이 씨 청취), 수기 3편, 자료 5편, 설계도(반도인 합숙소, 화공 및 포로수용소), 하야시 씨의 특징인 다수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기 한 편은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서 최초의 반도인 현장을 담당한 쓰키아시 쿠니오(月足国夫) 씨가 규슈광산학회지에 실은 논문이며, 이는 우리 채광기술자 입장에서 보아도 옳다고 생각된다. 다른 두 편은 영국인 포로의 서적을 번역가에게 양해를 구해 발췌 번역한 것인데, 오문(잘못 들은 이야기), 전문(전해 들은 이야기)이 아주 많은 책이다. 나중에 오문과 전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적하겠다.
이 ‘타향의 탄광’을 다 읽고 바로 느낀 점은
- 이 편집자는 정말 일본인일까?
- 이러한 일부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고 탄광의 밝은 측면은 전부 생략한 보고서를 보고, 편집자가 말하듯 치쿠호(筑豊)의 젊은 세대들이 고향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 증언, 이른바 청취 기록은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생각을 기준으로 취사 선택해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과거에 출판된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과 같은 맥락이다. 편향적이다.
- 대다수의 탄광 인들이 가지고 있는 ‘탄광 시절은 좋았지……’(하야시 씨 자신도 ‘후기’에 그렇게 서술함)하는 심정과는 정반대의 왜곡된 사례만 거론했다.
- 완전히 정반대인 증언이 같은 책 속에 나오는데 편집자는 확인했는가? 퇴고했는가?
- 전 미쓰이 야마노 탄광 근무자이자 탄광에 자긍심을 가진 자로서 이런 책이 진실한 탄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상에, 아니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겠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이나쓰키마치(稲築町)는 탄광으로 번성했던 마을이다. 주요 탄광이 있었던 시,읍은 석탄 자료관을 건설했다. 현(県)내의 오무타(大牟田)시, 다가와시(田川市), 노오가타시(直方市), 宮田町(미야타마치)는 각각의 특색을 담아냈다. 이나쓰키마치(稲築町)에서도 어느 정도 석탄 자료가 수집되어 뒤늦게나마 내실 있는 석탄 자료관을 만들어 ‘이나쓰키마치(稲築町)는 석탄으로 번성한 마을이다’고 자손들에게 전승할 계획을 세웠지만, 애석하게도 거품경제의 붕괴로 긴축재정이 실시되어 자료관 건설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석탄 산업 자료가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이 모아 후세에 남기려고 현재 ‘석탄 산업 자료조사 연구회’를 운영 중이다. 즉시 연구회 관계자에게 이 ‘타향의 탄광’을 읽어 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편향된 책을 보면, 이나쓰키마치(稲築町)의 핵심기업이었던 미쓰이 야마노 탄광과 관련해 전쟁 시 탄광, 특히 미쓰이 야마노 탄광은 이렇게 심한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일단 출판되면 모르는 사람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나쓰키마치(稲築町)나 미쓰이 야마노 광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진실한 탄광의 실태’를 남겨야 한다. 석탄 산업 자료조사 연구회가 중심이 돼서 <타향의 탄광>의 핵심을 이루는 전쟁 중 반도인, 화공, 포로의 ‘가혹한 강제노동, 학대, 도주, 학살’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를 규명하자. 특히 편집자인 다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하야시 에이다이 씨는 둘 다 탄광 경험이 없고, 갱내 노동의 실태나 전시 중 반도인, 화공, 포로의 실태도 모를 것이다. 또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문장에는 갱내 경험자라면 금방 알 수 있는 잘못된 기술들이 많다. 경험자가 올바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이야기도 가장 힘이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반도인, 화공, 포로를 부린 경험자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자. 안타깝게도 개개인이 의견을 개진할 곳은 없다. 연구회 입장에서 당시에 어땠는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좌담회를 꼭 개최할 필요가 있다.”
는 결론에 이르러 즉시 전시 중 반도인, 화공, 포로를 부려본 적이 있는 경험자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쓰이 야마노 광산이 폐쇄된 지 27년이나 지나 많은 경험자가 도쿄나 교토, 오사카, 고베 방면에 재취업한 상태였다. 게다가 전시 중의 일이라, 종전 시 스무살이었던 사람도 이미 75세가 되었다. 건강하게 살아계신 분들도 적다. 결국 6명이 모여 좌담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다음 항목에 좌담회 내용을 기술하겠다. 이는 테이프를 듣고 옮겨쓴 것이라 좌담회 내용과 동일하며, 하야시 씨처럼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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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좌담회 ‘전시 중 미쓰이 야마노 의 외국인 노동자’
2000년 3월 24일 개최
[좌담회 기록 및 녹음테이프는 발견되지 않았음. ――주석:미와(三輪)]
- 좌담회를 마치고
‘전시 중 미쓰이 야마노의 외국인 노동자’의 전 탄광 일꾼들 좌담회 내용을 읽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타향의 탄광> 기술과는 완전히 정반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좌담회 내에서 사회를 맡은 사이(佐井) 씨는 3년간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사람인데, 전시 중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반도인, 화공, 포로의 사역 실태를 이 좌담회에서 처음 알고, “거실도 그렇고 설비도 그렇고, 포로들은 우리 시베리아 억류자들이랑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겠네요……”라고 말했다.
<타향의 탄광>에서 조선인은 강제연행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합숙소는 마치 강제수용소처럼 기술되었지만, 좌담회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또 행동도 자유로웠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세계의 그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겠다. 현재 주요국 대도시에서 여자가 밤중에 안심하고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도시가 일본 외에 또 있을까. 게다가 이는 전후의 평화로운 현재의 일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 중에도, 2차 대전전에도, 에도시대 때 조차도 그랬었다. 일본인의 준법정신과 엄격한 규율준수는 국민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 평화롭고 안전한 일본에서도 살인이나 범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 살인이나 범죄만 일방적으로 침소봉대 식으로 보도하고 계속 써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남징대학살,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문제가 바로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위험한 나라라 믿을 것이다. 탄광의 실태도 완전히 그와 마찬가지이다.
‘100명 중 한 명만 불평을 늘어놓을 경우, 그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마치 100명을 대표하는 것처럼 쓰는 기법이 있다. 1%의 사람이 불평을 늘어놓아도 불평한 사람의 주장만 모아 놓으면 못된 짓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으면 역사적 사실은 공평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시각과 사고방식에 관해 읽고 전적으로 동감해 내 처세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데, 실제로 자치회 등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을 수렴해 일을 진행하는 것이 민주주의이자 인간사회가 아닐까 싶다. <타향의 탄광>을 읽고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이 논리였다.
또 동시에 ‘이 편집자는 정말 일본인일까?’라는 생각이 든 이유는 <논어> 속에 양을 훔친 아비의 죄를 정직하게 관리에게 고발한 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받은 공자가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죄를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죄를 숨겨주는 것이 정직한 일이다”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정이 아닐까. 일본인 작가가 1%의 일본인이 저지른 악행을 왜 100%인 것처럼 써대는 것일까. 99%의 탄광인들은 ‘탄광 시절은 좋았지’라고 회상하고 있지 않은가. 전 탄광 일꾼들의 좌담회에서도 그런 심정이 넘쳐 흐르지 않는가. 이것이 진실이다.
부제를 ‘거짓과 날조, 오문, 전문을 배제한다’라고 붙였는데, 좌담회에서도 그런 지적이 나왔다. 좌담회는 특성상 상세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 그 점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타향의 탄광>은 청취 형식의 증언이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편집자의 표현력과 능수능란한 문장력에는 감탄했지만, 이는 편집자의 편향된 의도로 증언자의 말을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취사 선택해 정리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편집자는 탄광, 특히 갱내 근무 경험이 없으며, 그래서인지 거짓과 날조가 많고, 상반되는 표현도 예사롭게 나온다. 아래에서 주요 항목에 관해서만 모순점을 지적하겠다.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관해
우리는 전시 중 반도인, 화공, 포로라 불리는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강제연행 관련 출판물에는 눈꼴사나운 왜곡과 날조가 너무 많다. 게다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조차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해 가혹한 노동에 종사시켰다. 또 여성들도 종군위안부로 강제적으로 전쟁터에 보냈다’고 기술하고, 칼럼난을 마련해 강제연행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싣고 있다.
예를 들어, 교육 출판은 ‘조선, 중국에서 강제연행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 치쿠호(筑豊)(후쿠오카현)의 탄광에서 일하는 김 씨’의 사례를 소개했다.
김대식(金大植) 씨는 1943년 2월, 집에서 자고 있던 참에 경찰관과 관청 직원이 징용 영장을 들이 내밀며 쳐들어와 집결지까지 수갑을 채운 채 125명의 조선인 동포들과 함께 일본으로 연행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는 도중 감시가 엄격했고, 화장실에 갈 때조차도 7명의 감시원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일행이 후쿠오카현 타가와고토우지(田川後藤寺)역에 도착하자,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백 명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후략).[방점은 아토베 씨가 찍은 것이다. 이하 동일. -주석:미와]
도쿄서적은 ‘조선인 강제연행’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조선인 강제연행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결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42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관 알선’이 시행됩니다. 일본의 공적 기관이 직접 관여하게 된 것입니다. 총독부의 할당을 받고 경찰관과 관리가 신발을 신은 채 집에 쳐들어가 자는 남자를 집에서 끌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항하는 자는 목검으로 후려치고, 울부짖으며 트럭에 매달리는 아내와 자식을 위에서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후략)
이처럼 강제연행과 관련해서는 한결같이 ‘자고 있던 참’, ‘목검으로 후려치고’, ‘트럭’, ‘매달리는 아내와 자식을 위에서 발로 걷어찼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 정말 2차 대전전에 수신(도덕) 교육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한다고 자부한 일본인들의 소행일까 싶어 도저히 납득이 안 갔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닛테츠(日鉄)광업에 근무해서 전시 중 조선에 모집하러 간 것을 알고 강제연행 여부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강제연행 같은 건 절대로 안 했어. 종전이 돼서 조선으로 송환할 때도 어렵사리 편의를 봐주었더니 너무 기뻐했고,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몇 명이나 ‘고마워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왔을 정도야.”라고 해서 ‘또 반일 좌파세력들이 선동한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징용령은 내지(일본 본토)의 경우 1939년에 공포되었는데, 조선에서 징용령이 시행된 것은 1944년의 일이라, 김 씨에게 1943년 2월에 징용 영장이 발부되었을 리가 없다. 완전한 날조이다. 또 타가와고토우지(田川後藤寺)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백 명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돼 있는데,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환영하러 나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좌담회에서도 나온 말인데, 야마노신문에는 ‘카모오(鴨生)역에 마중 나가 카모오 클럽에서 환영 행사를 거행했다’고 표현되었다. 정말 그렇게 참혹한 강제연행을 저질렀다면 그들을 수용하는 합숙소는 포로수용소 이상으로 엄중한 경비가 이루어졌을 터인데, 실제 반도인 합숙소는 내지인 독신자 합숙소와 거의 똑같은 설비를 갖추었고, 좌담회에서도 지적되었듯 자유롭게 행동했을 리가 없다. 우리도 함께 일 하면서 조선인들이 억지로 강제연행되어 끌려온 모습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인 징용공 수기’(카와이 출판)라는 책 속의 정충해(鄭忠海) 씨 수기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1944년 11월말에 징용영장을 받은 정충해 씨는 ‘……뒤를 돌아보며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집합장소인 영등포 구청앞 광장을 향했다. 광장은 출발하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징용자 호명과 인원 파악이 끝나자 일동은 대열을 지어 상공회의소 앞에 모여 각지에서 동원된 사람들과 함께 장행회(격려 행사)를 개최했다.’(후략)
출발하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으로 가득했고, 장행회도 열었다고 나온다. 이 수기를 보면, 징용된 사람의 경우, 걷고 있는데 잡혀서 억지로 트럭에 실렸다거나, 자고 있던 참에 끌려갔다거나, 폭력적으로 납치되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당시 일본 시정권 하의 일본법이 적용되는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장행회까지 열고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강제연행되었다고 치면, 일본 내 징용공들이나 여자 정신 대원들도 다 강제연행되었다고 해야 마땅하다.
내가 너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일본인 중에 거짓 증언을 해서까지 허위 조작을 하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에게 빌붙어 거짓말을 해서까지 증언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사죄이고, 그걸로 자신은 면죄된다고 믿는 모양인데, 나는 반대로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자고 있던 참에 신발을 신은 채 쳐들어와 수갑을 채우고 트럭에 실었다. 저항하는 자는 목검으로 후려치고, 울부짖으며 트럭에 매달리는 아내와 자식을 위에서 발로 걷어찼다. 이러한 강제연행의 실태가 있었다면, 긍지 강한 조선 민족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반드시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종전 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이 다 무사히 귀환한 것은 왜일까? 조선 민족은 밟거나 차이는 모욕을 당해도 저항하지 않는 한심한 민족이었을까? 그런 식이 되지 않는가. 나는 오선화의 ‘치맛바람’ 3부작, 김문학과 김명학의 공저 ‘한국민에게 고함’ 등을 읽고 역시 조선 민족은 일본인에게는 없는 훌륭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민족이 종전 후 일본이 무력해진 시기조차 일본인에게 별로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에 지금 거론되는 듯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반일 좌익 문화인 또는 반전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며 비판적인 주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넘기지만, 내가 1965년 야마노 탄광 가스폭발 사고 피해를 보아 입원했을 때 공산당원 친구가 문병 와서 말하기를 “자본주의 사회는 돈 버는 것만 생각해 안전을 소홀히 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중국에서는 탄광 폭발사고가 절대 있을 수 없어. 파리 한 마리도 없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자본주의 사회 경영자들도 바보는 아니야. 안전을 소홀히 해서 일단 이런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회사가 망하잖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이런 사고라는 것은 인간의 맹점을 찌르고 일어나는 법이야. 안전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반드시 맹점은 있어. 인간은 신이 아니야.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지. 하지만 너희는 이걸 일방적으로 안전경시라 주장하는데, 중국에서도 반드시 낙반 사고가 발생하고, 가스폭발도 일어날 거야. 또 파리가 한 마리도 없다는 점도 절대 믿을 수 없어.”라고 반발했는데, 현재는 어떠한가.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 국가의 실태가 드러났다. 소련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100만명의 일본인을 시베리아에 강제연행해 억류하고 40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공산국가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기 각각 2천만명이 죽었는데도 좌익사상에 물든 자들은 아직도 거기에 관해 아무말 도 하지 않는다. 중국이 해방정책을 펼쳐 일본인 여행객들도 꽤 늘어 실태가 드러나고 있는데, 그래도 파리 한 마리도 없다고 우길 셈인가. 아주 최근에 중국 탄광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해명해 주기 바란다.
강제노동에 관해서도 언론이나 관련 출판물을 보면 날조되고 과장된 거짓말이 진실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어째서 이런 논리가 펼쳐지는가. 탄광 기술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들다.
다음은 강제노동과 관련해 허구성을 약간 짚어보겠다.
(1)죽음과의 싸움(<사진만엽집, 치쿠호(筑豊)2 위대한 불(상)> 우에노 에이신(上野英信), 조근재)
‘일본이 패전한 다음 해 <치쿠호(筑豊)> 지구의 노동자 1인당 월평균 출광량은 5.2t에 불과했지만, 1950년에 8.8t, 1961년에 18.6t , 1956년에 33.2t으로 급상승했다. 얼마나 지독한 노동강화를 해서 전후 복구의 원동력을 확보했는지 분명할 것이다.’(P35)
(반론)
능률향상은 다 노동강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입하려 한다. 인간의 노동력 차이는 별거 아니다. 능률향상의 주요 원인은 대부분 합리화, 기계화에 의한 것이다. 능률향상이 노동강화에 따른 것이라면 일본이나 미국 같은 생산성 상위국가의 노동자들은 급여 수준이 100분의 1에서 고작 높아도 10분의 1이라 일컬어지는 후진국 노동자들의 100배에서 10배의 노동강화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일까.
(2)위험한 작업은 조선인(대부분의 강제노동 보고서에 나옴)
위험하고 힘든 작업, 여건이 나쁜 곳에는 조선인을 투입하고, 내지인은 안전하고 편한 일만 했다. 그래서 조선인 사상자가 증가했다.
(반론)
신문기자가 기뻐하고, 탄광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사람들 입장에서 금방 혹할
만한 사례이지만, 이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갱내 실정을 모르는 이들이다. 석탄 채굴 현장은 높이 1.5m 내지 2.0m 정도의 석탄층으로, 길이는 50~100m 정도 되며, 하루에 전체를 1m나 2m 캐내는 법이다. 예를 들어, 높이 2.0m, 갱도 길이 100m, 진도 2.0m라 치면 하루 출탄량은 400㎥, 석탄 비중1.3이라 치면 520t을 출탄한다. 이를 1조가 채광하면, 2조는 충진(컨베이어 이설이나 발파산출, 감는 작업 등)을 담당하고 이를 반복한다. 따라서 하루에 2.0m 진도를 낼 예정일 경우, 평범한 능력만 가진 사람은 일부 단층이나 천장 조건이 나쁜 곳에서1.5m 밖에 캘 수 없다. 컨베이어 이설을 못 하면 다음 날 출탄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가장 기능이 우수한 사람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위험하고 여건이 나쁜 곳에는 내지인 중 기능이 우수한 사람을 투입해야 일정하게 2.0m의 진도를 확보할 수 있다. 미쓰이 야마노의 조선인의 경우, 빨리 온 사람일지라도 4~5년밖에 경험이 안 됐다. 여건이 나쁜 곳, 위험한 곳에서는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기능을 가진 사람만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위험한 작업은 조선인’이라는 기록은 완전한 거짓이다.
(3)탄광에서는 사망자가 많이 나왔고, 하루가 멀다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청산되지 않은 쇼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 사진과 글:하야시 에이다이, 해설: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탄광 갱내작업은 지하에서 이루어지며, 자연을 상대로 하다 보니 위험한 작업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갱내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갱내근무의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장례식이 치러졌다’라는 기술은 납득할 수 없다. <사진만엽집, 치쿠호(筑豊)1 인간의 산>(P23)에는 1927년부터 31년까지 5년간 일본 전국 탄광 갱내 사망자가 3852명이라고 나온다. 다이쇼 말부터 쇼와 초기까지 더한 것이며, 갱내 사고가 잦았던 시절의 통계인데, 그래도 사망자는 연평균 770명이다. 그것도 전국 규모에서 그렇다. 전국에 몇백개나 있었던 탄광에서 매일같이 사망자가 나왔더라면, 770명으로는 어림도 없다. 몇만 명은 됐을 것이다. 현재 자살자 수는 연간 3만명을 넘고,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만명 내외이다.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서는 갱내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면, ‘올해는 사망자가 나왔어. 또 안전관리가 엄격해지겠군.”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몇 년에 한 명 순직자가 나왔다(가스폭발 사고는 제외). 그래서 ‘매일같이 장례식!......”이란 청취 기록은 탄광 노동자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인 강제노동과 마찬가지로 실은 탄광 노동자를 모멸한 것이다.
(4)대량 채굴일은 다음날 아침까지 노역을 당했다(<타향의 탄광>).
(2)의 위험한 작업은 조선인 부분에서도 언급했듯, 채광 현장은 채탄과 충진 2교대제 방식이었으며, 전쟁 중 대량 채굴일에는 분명 아침 7시에 입갱해 밤 8시에 승갱하는 일이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일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충전작업을 못 하면 다음 채광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 갱내 안전등은 12시간 이상 사용하면 컴컴해져서 못 쓴다. 대량 채굴일에 다음 날 아침까지 노역을 당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며, 완전한 거짓이다.
<타향의 탄광>에는 이상한 기술들이 도처에 보이며, 전혀 정반대의 이야기가 당당하게 게재되어 있다. 편집자는 경험자의 이야기를 듣고 문장으로 엮어냈을 텐데, 이런 모순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관해서는 앞서 서술했기 때문에, 조선인 도주에 관한 모순점을 밝히고자 한다.
1의 ‘가’(서두, 다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P20) ‘그렇다 치더라도 절반이 도주한 것은 심하다. 절반이면 8만 6100명, 그중 10%는 발견되어 데리고 돌아왔지만, 90%인 8만 5239명은 소식 불명인 상태로 완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1의 ‘나’(앞과 동일, 니시다 아키라(西田 彰) 씨의 이야기 P21):‘조선인 도망자 중에는 겨우 도망친 자도 있었지만, 길눈이 밝지 않아 대부분 금방 붙잡혔다. 야키야마(八木山) 고개에는 경찰이나 소방 단 등이 비상선을 치고 있었고, 헌병도 엄했다.’
(반론)
니시다 씨의 이야기를 보면, 도망자가 대부분 붙잡혔다고 되어 있는데, 도주 통계에서는 발견된 사람이 10%였다. 또 전시 중 경찰, 소방 단, 헌병이 조선인 도주방지를 위해 비상선을 칠 만한 여유는 전혀 없었을 터이다. 다케토미 씨의 서두에서는 90%가 소식 불명인 상태로 완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고 기술되어 자못 살해당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는 탄광 이외의 각지 동포의 거처나 소형 탄광 등으로 도망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저 자세한 사항을 파악하지 못할 뿐이다.
2의 ‘가’(편집에 즈음하여, 하야시 에이다이 P22-23):‘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국민징용령을 적용해 국가 전체가 관여해서 강제적으로 조선인 사냥을 한 것이다……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명의 도주자도 없었다고 한다.’
2의 로(앞과 동일 P24):‘연행 도중 열차에서 뛰어내리거나 부산에서 배를 기다리던 여관에서 도주해 탄광에 도착했을 땐 절반밖에 안 된 적도 있었다.’
(반론)
어느 쪽 이야기가 맞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게다가 이는 ‘편집에 즈음하여’에서 하야시 에이다이 씨가 쓴 P22-24의 문장이다. 지리멸렬하다. 이러한 정반대의 기술이 도처에 보인다.
3의 ‘가’(앞과 동일 P24):‘군수 성은 거의 미친 듯이 석탄 증산 명령을 내려 탄광에는 ‘대량 채굴일’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말인 토요일이 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채광시켰다. 일요일 아침에 합숙소에 돌아온 후 저녁에는 또 출근해야 했다. 그것이 계속되면 한 달에 한 번도 쉴 수 없었다.
한 달에 네 번 ‘대량 채굴일’이 있으면 체력에 한계가 온다. ‘죽어도 좋으니까 탄광에서 도망치고 싶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도주의 길을 선택했다.[방점은 아토베 씨가 찍은 것이다. 이하 동일. -주석:미와]
3의 ‘나’(증언:특별고등경찰, 전 이이즈카 경찰서 특별고등경찰 주임 가키야마 시게하루(柿山重春) P54-55)
“최초 모집당시와 후기 징용시대는 강제연행 내용이 전혀 달랐죠. 1940년, 41년까지는 내지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 야심가들이 있어 모집을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와 금방 도주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건 조선에서 생활할 수 없다는 양심적인 이유에서 온 거였죠……합숙소 주위에 판자 울타리가 있긴 했지만, 사람이 일단 도망치려고 작심만 하면 그 정도 장애물은 거뜬히 넘을 수 있었어요. 형무소나 감옥이랑 달라 대수롭지 않았거든요.
치쿠호(筑豊)의 탄광에 오면, 그 곳 조선인 합숙소나 주위의 아리랑부락에 친척이나 고향친구가 반드시 있었으니까요. 다른 탄광이나 공사현장은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등, 어디가 돈을 벌고 못 버는지 환하죠. 여러가지 권유도 받구요. 오사카 근처의 친척집에 가자는 식으로 금방 짜고 도주하니까 방심할 수 없었어요.”
3의 ‘다’(증언:폭동진압 전 다가와경찰서 특별고등경찰 주임 만쇼 주타로(満生重太郎) P60-61)
‘맨 처음 대형 탄광에 강제연행된 조선인 광부는 그 후 소형 탄광으로 도주했다.
탄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광부를 알선하는 전문 알선업자가 있었고, 탄광이 전속으로 고용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마을에 놀러 온 조선인을 살살 꾄다. 밥을 맘껏 먹여준다든가, 월급을 두 배나 준다든가, 일주일에 이틀은 쉬는 날이 있다는 식으로 그들이 혹할 만한 제안을 하니까 그걸 믿고 홀딱 속아 넘어갔다.
그래서 작은 탄광의 경우 조선에서 모집하려고 공을 들이지 않고도 노동력을 확보했다……강제연행되기 전부터 오사카 근처로 갈 결심을 하고, 탄광은 거쳐 가는 한 단계라고 생각했다.’
(반론)
조선인 도주의 원인은 하야시 에이다이 씨 등에 따르면, 먹을거리도 안 주고, 혹사당하며,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이르러 죽어도 좋다고 각오하고 도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당시 특별고등경찰 주임 두 사람은 다 그렇지 않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특별고등경찰 주임 두 사람이 강제연행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강제연행이라는 용어는 없었으며, 이 증언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하야시 에이다이 씨가 문장으로 엮어낸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강제연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종군위안부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없었는데, 최근 20년간 언론이 떠들썩하니까 우리도 무심코 종군위안부라 표현하면서도 내심 그냥 위안부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조선인 모집도 어느새 강제연행이 되고 말았지만, 두 사람 다 내심 모집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하야시 에이다이 씨는 조선인 강제연행 전문가라 불린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의 증언 속에서도 조선인들이 자유롭게 행동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정말 이런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이 있었다면 반도인 합숙소는 필연적으로 강제수용소가 되었을 터이고, 이런 자유행동은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 당시를 경험한 우리 입장에서 보아도, 함께 일했을 때 그런 호된 강제연행으로 끌려온 자들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그런 강제노동의 실태도 없었다는 사실을 좌담회 전 탄광 일꾼들도 말했다.
4.‘대단한 피크닉은 아니었다’는 거짓과 오문, 전문에 대해.
하야시 에이다이 씨는 ‘편집에 즈음하여’ 속에서 ‘포로의 탄광 노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영국인 포로 백스터 씨가 기록했으므로 생략한다’고 썼으며, 존 백스터 씨의 <대단한 피크닉은 아니었다>(아카마 마사히사(赤間正久))에서 발췌한 것을 수기 형식으로 게재했는데, 이 포로기는 굉장히 오문이나 전문이 많은 책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짓이 많은 책이다. 그는 1941년에 징병 되어 1942년에 자바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어 종전 시까지 이나쓰키마치(稲築町)의 미쓰이 야마노 광산 공작과 전기수리 공장에서 전시포로로 고역을 겪은 사람이며, 종전 후 나가사키와 캐나다를 거쳐 모국인 영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한 포로체험을 <대단한 피크닉은 아니었다>에 발표했다.
번역자인 아카마 마사히사(赤間正久) 씨는 이나쓰키마치(稲築町) 문화연합 회장을 맡았고, 백스터 씨가 미쓰이 야마노 탄광 포로 시절의 얘기를 썼다고 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전시 중 당시의 상황을 아는 자로서 미쓰이 야마노 시절의 기술이 거짓과 오문, 전문이 많아 미쓰이 야마노 탄광 이외의 이야기, 즉 포로가 된 후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으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아래에 원문을 기재하고, 어디가 거짓이며, 오문, 전문인지 지적하고자 한다.
캠프로 가는 도중 주재소를 지나갔다. 현관 입구에 한 일본인 젊은이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다. 호위병은 그가 도둑이며 벌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관 앞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휘청거리는 불운한 젊은이를 차거나 때리도록 요구받았다. 이렇게 우리는 이 원시적인 습관에 익숙해졌고……P115
(일본 주재소에서, 특히 미쓰이 야마노 탄광 주재소에서 이런 형벌이 내려지는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오히려 영국이나 자바에서 이런 형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완전한 날조)
풀도 나지 않고,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았다. P115
(사막도 아닐 테고, 이나쓰키마치(稲築町)의 경우 버력 더미 이외에 이런 곳은 없다. 포로의 체험기라고 과장한 것이다.)
입갱 방법은 말하면 머리끝이 쭈뼛해지는데, 권양기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풀면 12대인가 13대의 광차가 1/10 경사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끝없이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아마 반 마일 정도였을 것이다. 뒤의 제동 수(브레이크 담
당자)가 바퀴를 늦추기 위해 제동을 걸면 끼익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이 나며 광차가 지
하 제1 장소에 정지했다. P120
(사갱(경사진 갱도)의 인력수송차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인력 수송차는 인력수송차 자체의 브레이크로 멈추지 않는다. 인력수송차 통행은 권양기로 운행, 정지한다. 맨 앞과 맨 뒤에 차장이 타고 있으며, 신호를 받고 권양기를 운행, 정지한다. 갱내 경험자라면 금방 알 수 있다. 백스터 씨는 공작과 전기수리 공장에 배치되었으며, 갱내 경험이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오문, 전문에 속한다.)
갱내는 몽땅 캐낸 상태였다. 탄층이 얇은 저질의 석탄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대부분이 바위였다……중략……
전시의 물자 부족 탓에 쇠밧줄은 강철선을 합쳐 꼬아 만들었으며……P121
(탄층을 죄다 캐낸 상태라면 미쓰이 야마노 탄광은 종전과 동시에 폐쇄해야 했을 것이다. 또 쇠줄은 물자 부족 탓에 강철선을 합쳐 꼬아 만들었다고 했는데, 쇠밧줄은 유연성과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가는 강철선을 합쳐 꼬아 만드는 법이다. 칸몬대교나 아카시대교의 거대한 쇠줄도 다 그런 방식으로 만들었다.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백스터 씨의 견해는 기술자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동양의 교육 수준이 매우 낮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늘 10까지 셀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했다. P123
(백스터 씨는 42년부터 45년까지 일본 포로로서 일본인과 접촉했으며, 일본인들의 교육 수준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동양인 멸시의 발로이다. 당시 일본인 중 10까지 셀 수 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보통교육 취학률은 당시에도 최고 수준이었다. 미국 병사 중에는 곱셈이나 나눗셈을 못 하는 자가 꽤 있었다고 한다.)
아아, 우리의 모든 노력과 일본인 감독자의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엄청나게 심한 공중폭격을 당했는데, 공중폭격 중 가끔 1000파운드(454kg) 폭탄이 낙하해 정확하게 떨어져서 두 대의 반질거리는 엔진 차를 적중시켜 다 고철이 되고 말았다. P130
(미쓰이 야마노 탄광이 공중폭격을 당한 적은 없고, 필리핀에서 가져왔다는 엔진 차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다. 또 당시 폭격기가 걸프전때 사용된 것처럼 한밤중에도 명중시킬 수 있는 첨단기능을 갖추었을까? 이것은 완전한 날조이자 거짓이다.)
탄차가 질주한 이야기 P134
(사갱 권양기 운전사가 10상자들이 석탄 운반차를 매단 채 권양기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없다. 또 사갱 권양기는 마력이 300 내지 500이나 돼서, 초심자가 권양 구역에 침입해 쉽게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풀 수 없다. 이 이야기도 오문, 전문, 날조에 속한다.)
영국 공차의 낯익은 국적 마크를 달고……연합군기가 지나간 직후 근처 폭탄 비축 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우리는 공중에 몇백피트나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었다. P149
(이나쓰키마치(稲築町)의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서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보일 리가 없고, 전쟁 말기의 연합군기는 다 미군기였다. 이것도 완전한 거짓말이다.)
백스터 씨의 미쓰이 야마노 관련 포로 생활 글을 읽고 느낀 점은 특히 미쓰이 야마노 가 폭격당했다는 둥 이나쓰키마치(稲築町)에서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보였다는 둥 완전한 거짓말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백스터 씨는 공작과 전기수리 공장에 배치되어 갱내 경험이 전혀 없다. 갱내 이야기는 다 전문이나 오문이다. 지금 보면 백스터 씨의 귀중한 포로 체험기이고, 잘 보이려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너무나도 거짓이나 오문, 전문이 많다. 따라서 포로가 돼서 해방될 때까지의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현장을 알고 있는 우리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사실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마리의 개가 공연히 짖으면, 다른 개들도 덩달아 짖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이런 일을 가리킬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 맺음말
이상, <타향의 탄광>의 기술을 살펴보면, 문장은 능수능란하지만, 얼마나 당시의 탄광의 어두운 부분만 골라 과장했는지 이해될 것이다.
끝으로 반도인 합숙소와 포로수용소에 관해 약간 짚어보겠다.
<타향의 탄광> 띠지에 ‘나아가 소각 처분되었을 터인 미쓰이 야마노 탄광의 수용소 설계도가 전시 하의 탄광 실태를 밝힌다’고 쓰여 있는데, 신문에도 한때 보도된 적이 있었다. 마치 옛날 건설 현장의 “타코베야”를 연상시키는 듯한 표현인데, 막상 실제 설계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구조가 탄탄하다는 점, 1인당 거주면적이 넓다는 점 등 전시 중 합숙소, 수용소 설비치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좌담회 내에서도 나왔듯, ‘일본인 광원주택보다 좋은 것 같다’고 생각된다. 이는 편집자의 뜻과는 반대의 효과를 내는 결과를 빚은 것 같다. 나는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서 태어나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서 자란 사람인데, 내가 어렸을 때 산 광원주택은 두 세평 정도의 방 두개짜리로 구성된 기다란 연립주택이었고, 거기에 9식구가 살았다. 1인당 넓이로 환산하면 반평 정도라 반도인이나 화공, 포로수용소가 더 넓은 셈이다. 나아가, 반도인 합숙소 설계도에 ‘도주 방지용’으로 높이 7척짜리 판자 울타리를 설치하겠다고 신청한 것을 발견하고, 기고만장하며 곳곳에 써 놓았는데, 이는 당시가 전쟁 중이었고, 통제경제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자재는 배급제였다. 따라서 합숙소 주위를 칠 판자 울타리 재료를 배급받기 위해 ‘도주 방지용’이란 이유를 단 것에 불과하다. 그 증거로 특별고등경찰 주임은 ‘그 정도 판자 울타리는 도주 방지용으로 쓸 수 없다’고 증언했고, 실제로 조선인은 자유롭게 행동했지 않았는가. 7척짜리 판자 울타리를 쳐서 도주가 줄었나 하면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판자 울타리는 어디까지나 경계용 판자 울타리이지, 도주 방지용 울타리가 아니었다. 참고로, 일본인 독신자용 합숙소 주위에도 비슷한 경계용 판자 울타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편집자들은 몰랐던 것일까.
‘100년 전을 비판할 때 현재의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 100년 전의 시점에 서서, 사물을 봐야 한다’고 종종 일컬어지는데, 현재도 도쿄나 오사카의 간이 합숙소는 이단 침대의 반평짜리 방이 아니던가. 1%를 100%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히라노 하야토(平野準人) 씨(백스터의 지도원, 이나쓰키마치 에다사카 거주)의 증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카모오(鴨生)역에서 내려 트럭에 실린 포로들이 수용소 쪽을 향해 갔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기타나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아주 떠들썩했다.
전쟁포로라는데 전혀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고, 굉장히 쾌활한 일행이었다. 포로인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하고 놀랐다’(<타향의 탄광>, P118).
또 ‘식사가 끝나면 구두로 리듬을 밟아 탭댄스를 추거나 두 개의 숟가락을 손에 들고 탁탁 맞부딪치며 노래를 부르고 즐겼다. 나는 이게 전쟁포로인가 싶어 기가 막혀 바라보고만 있었다’(앞과 동일, P120)는 대목도 나오고, 포로나 반도인은 식량이 부족했을 당시에도 삼시 밥을 먹었고 매일 목욕도 했다. 반도인의 경우, 독신 합숙거주자라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아내가 있는 자는 일본인과 같은 주택에서 생활하고 같은 목욕탕을 썼다.
또 한 명의 영국인 포로 에디 호킨즈 씨의 ‘제8 포로수용소의 실체’를 발췌 번역해 수기로 게재했는데, 그는 결론에서 ‘이 수용소에서 이루어진 탄광 노동이 전쟁포로에게 적절했는지 여부는 국제법 전문가에게 판단을 맡기겠는데, 일본인들은 아마 일본인들과 조건이 똑같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수긍할 만한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이 주장을 고려하는 사람이 전쟁 중 탄광 사정에 밝은 사람이기를 바란다’(앞과 동일, P147)고 말했다.
반면, 시베리아 억류자는 전쟁 중 포로가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 강제적으로 연행되어 약 40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으며, 좌담회에서도 그 노동 실태를 일부 소개했다. 사이 씨가 “거실도 그렇고 설비도 그렇고, 포로들은 우리 시베리아 억류자들이랑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겠네요. 이 책에는 포로들이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살았다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반평짜리 방에 2.5명을 몰아넣었어요.”라고 너무나 잘 표현한 일련의 이야기에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나 싶다. 소련과 비교해 일본에는 이른바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의 실태는 없었다. 우리는 가슴을 펴고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소련의 시베리아 억류자 여건과 설계도에 나타난 반도인, 화공, 포로들의 1인당 약 0.75평이란 일본인과 동등한 설비, 반도인의 행동의 자유, 도망친 진짜 이유 등을 통해 편집자는 어떤 진실을 발견했는지 듣고 싶다.
게다가 당시는 전쟁의 극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일본민족의 생사를 걸고 총력을 결집해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싸웠던 시기이다. 비상시 상황을 평화로운 평시의 시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극한 상태의 비정상적인 시기의 1%의 어두운 부분을 파헤쳐 강조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전후 세대가 고향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타향의 탄광> 끝부분에서 ‘옛날 탄광은 좋았어’라고 99%의 탄광 일꾼들이 너무나 잘 표현한 것처럼, 밝고, 해방감이 느껴지며, 차별의식이 없고, 활기 넘친 탄광의 진실한 모습을 문장 구사 능력이 뛰어난 편집자가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바란다.
(글 책임자:佐井, 跡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