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 씨에 대해서
“마쓰모토 씨, 아직도 살아 있는 건가!”
이노우에 히데시 씨는 외쳤다.
이노우에 씨는14살 때, 하시마 섬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갱내 측량반 소속이었다.
마쓰모토 씨는, 저번에 편집 일기에서 소개한 마쓰모토 사카에 (松本栄)씨이다.
이노우메 히데시 씨 (촬영:무라오 마사미)
이노우에 씨는 1929년, 8명 형제(남자5명, 여자3명)의 넷째 아들로, 하시마 17호동 8층 안벽 측에서 태어났다. (하시마 지도 참조). 아버지는 시마바라에서 신사 전문 목수를 했고, 1925년 29살 때, 하시마에 이주(당시 가족은 5명), 갱내 공사에 종사 했다. 이노우에 씨는 소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나가사키의 학교에 다녔지만, 전쟁 상황이 어렵게 된1944년 4월, 14살 때 하시마의 미쓰비시 하시마 광갱무과. 측량부에서 갱내 측량을 했다. 그때로부터 13년 2개월 측량을 했다. 16살 때, 종전을 맞이했다. 1957년에 이동, 이후 7년 4개월 갱내 보안 계원으로 채탄, 굴진 업무를 했다. 계 20년 6개월 갱내에서 일하고, 34살 때, 가족 4명으로 다카시마로 이주했다.
쇼와3년(1928년)의 하시마 섬
출전:簑田直規 1930 “미쓰비시 다카시마 광업소 하시마갱 실습 보고. 규슈 공업 대학 소장” 을 기초로 작성.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돌아가셨다
2016년10월29일, 그 날은 7월, 9월에 이어서 세 번째 인터뷰이었다. 몸매가 큰 이노우에 씨는 푸른 파일을 들고 4시간 반 쉼 없이 예기하셨다. 하시마에서 하신 갱내작업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눈빛이 예민해지고 예기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나는 나가사키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듣고, 질문을 되풀이했다.
이노우에 씨가 넘겨주신 당시 자료
이노우에 씨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작성한 팸플릿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상반신 옷을 벗고 갱내 작업을 하는 갱부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하시마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조선반도 출신자의 이미지로 사용되어 있었다. 이노우에 씨는 이 사진에 크게 반응하였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작성, 제39차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배포한 팸플릿
“누워서 작업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위험하고 의무 의반이니까 갱내에서 옷을 벗고 작업은 못 한다. 석탄가루로 상처하는 경우도 있어. 작업복이 없으면 반소매는 있을지도 모른다”
전후 영화 “초목이 없는 섬” 채탄 현장에서, 상반신 옷을 벗은 채탄부 장면이 있는 것을 나는 지적했다. 사진이 취미이신 이노우에 씨는, 하시마 사진반으로 촬영 현장에도 참가. 가스가 위험해서 갱내에서는 촬영 못 했다.
세 번째 인터뷰가 끝마치고 이노우에 씨가 집에 도착할 무렵, 나는 고바야시 하루에(小林春江) 씨와 아다치 키요코(安達清子) 씨 자매에 인터뷰를 시작하고 있었다. 고바야시 씨는 마쓰모토 사카에 씨 동창이고, 여동생인 아다치 씨도 하시마에서 자랐고, 전쟁 중 하시마에 대해서 들었다. 그때 이노우에 씨가 방에 돌아오셨다. 인터뷰를 시작해서 30,40분 쯤 지났을 때였다.
“들어오세요”라고 말을 걸면 의자에 앉으셨다. 의자가 낮았기 때문에 큰 몸이 작게 보였다.
고바야시 씨와 아다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노우에 씨도 인터뷰에 참여했다. 이노우에 씨는 말이 빠르고 분위기가 밝아졌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노우에 씨가 그때까지 못 했던 이야기를 하셨다. 제2차 세계대전, 미군의 어뢰, 다카시마 후타고 발전소에로의 폭격, 등 어느 이야기도 귀했다. 마지막에 소중한 파란 파일을 받었다.
“이걸 받아도 되나요?”라고 질문하면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당신에게 주기 위해서 준비했다”라고 말씀 하셨다. 돌아갈 무렵, “당신 얼굴을 또 한 번 보고 싶어서” 이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인터뷰를 받는 이노우에 히데시 씨
2017년, 사카모토 도도쿠(坂本道徳) 씨(이노우에 씨 조카) 페이스북에서, 이노우에 씨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사카모토 씨는, 규슈 전승 유산 네트워크 회장으로서 세계유산 등록에 공헌하셨다. 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침에는 젊은 미소년인데, 저녁에는 백골이 된다”
하시마 장로에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내 삼촌.
1월6일에 하시마의 중요한 증언을 할 예정이었다.
그 자료를 보면서 편안히 돌아가셨다.
삼촌다운 마지막이었다.
87세.
또 한 명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밤샘에는 몇 십년 만에 친척들도 모였다.
사카모토 도토쿠 씨
"인간은 노인이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이 나중에 죽는다는 것은 없다. 누구나 그렇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받들고, 감사의 염불을 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복을 빕니다.
두 번째 인터뷰 때, 이노우에 씨에 사진을 선물하면, 어린이처럼 기뻐하셨다. 나가사키 시민 회간에서, 무라오 마사미 씨가 찍었던 사진을 확대한 것이다.
이듬해 1월4일, 마쓰모토 사카에 씨가 기획하신 나가사키 집회에서 이노우에 씨를 만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12월31일, 소바가 목에 막혀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마쓰모토 씨를 비롯한 하시마 출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기대하셨다고 한다. 책상에는 군함도에 관한 한국의 자료가 있었다. 못했던 말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 이노우에 씨는 억울한 마음으로 돌아가셨다.
한국에서 출판된 군함도 그림책에는, 조선반도 출신자가 심한 학대와 차별을 받고 있었다는 그림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시민단체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시마를 표지로 한 “훔쳐진 나라, 납치된 사람들”이라는 소책자, “눈떠라, 유네스코, 눈떠라 세계, 눈떠라 인류” 라는 팸플릿, “유네스코는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있을가”라는 전단지 등을 배포했다. 이 자료들에 대해서, 이노우에 씨는 끝까지 반박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노우에 씨 인터뷰
-----하시마에서의 근무에 대해서
“학교를 졸업한 것은 14살 때, 하시마 갱무 과 측량 반에 소속. 갱내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중략) 쇼와19년 3월 21일부터 시작, 갱외도 측량했다.
(2016년7월26일, 호텔 나가사키 BW 프리미어 컬렉션)
“나는 갱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으니까. 그 당시는 14살이라도 갱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2년 전에는 여성도 그랬지만 중지되었다. 종전 후에는 보호 공원이라고 해서, 18살이 안 되면 갱내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그 시대부터 들어갈 수 있었다”
“34살 때, 갱내 사고가 있어서 다카시마로 이동. 몇백 명 데리고 갔다. 60살이 정년인데, 일찍이 퇴직해서, 갱내 보안 감독국에 근무. 일단 기술자로 되었다”
(2016년7월26일, 호텔 나가사키 BW 프리미어 컬렉션)
------전쟁 중, 조선반도 출신인 소년이 하시마에서 일을 했습니까? 또 그 들에 대한 학대가 있었습니까?
“그런 게 없어요. 소년은 본 적이 없어요. (중략) 학대도 없고, 전부 허위인 것 같아. (중략) 나는 갱내를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었고 모든 걸 아니까. 조건이 나쁘면 일본인들도 말을 할 테니까. 물이 분출하거나 그런 자연조건은 있었지만” (2016년10월29일 호텔 뉴 나가사키)
-----도주가 발각하고 총살된 사건은 있었습니까?
“왜 총살…총이 없는데. 우리도 일을 끝난 뒤에는 청년학교 가서 군사 훈련을 했습니다, 총검술. 그때도 총은 본 적도 없고 사실 없었어요. 절대 없었어요. 누가 그런 말을…연극도 아닌데” (2016년10월29일 호텔 뉴 나가사키)
---전쟁 중, 미국의 잠수함이, 하시마에 정박하고 있었던 석탄 운반선・白寿丸(하쿠주 마루)에 어뢰 발사한 사건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쇼와20년6월11일, 미국의 잠수함 어뢰 공격으로 침몰. 깊이가 7m 밖에 없으니까 좌초했어요” (2016년9월18일 나가사키 시민회간)
――韓国の資料で、裸で横になり石炭を掘っている写真が多く使用されています。(参照:メッセージ映像「誰が歴史を捏造しているのか」) 端島炭坑で朝鮮半島出身の労働者は裸で掘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
“드라마도 아닌데, 탄광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사실 하시마는 특수한 곳이지만. 경사도 있고 게이지로 아래로 가야 했고. 그런 곳에서 옷을 벗고 작업은 절대 못 하지. 상처할 위험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2016년7월26일 호텔 나가사키 BW프리미어 컬렉션)
“갱내에서 옷을 벗고 작업은 못 해요, 위험하니까. 석탄 가루로도 상처하는데. 반소매는 있을 수 있다. 작업복이 없으니까. 옷을 벗으면 의무 위반이었다”
(2016년10월29일 호텔 뉴 나가사키)
----누워서 작업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누워서 작업 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은 경험이 없겠지. 채탄할 때, 경사가 60도 쯤 있으니까 모두들 들어갈 수 없다. 그 다음에 상하에 갱도를 만들 때, 7척의 들보와 갱목으로 이렇게. 거기에 탄차(炭車)가 들어가는 것이지”
(2016년10월29일 호텔 뉴 나가사키)
---- 직장이나 학교에서 조선반도 출신자에 대한 차별은 있었습니까?
"그 시대 공동 목욕탕이 있었는데, 우리 함께 들어갔어요(바닷 물을 끓인 탕). 결국 직원은 차별하고 본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 탕. 그 시대 변소는 산 쪽에 있었고, 그냥 팠던 것인데, 우리 같이 사용했어요. 세면소도 9층 건물에 만들었는데, 불편 했어요. 말을 하지 않으면 떨어진다. 그냥 팠던 것이니까. 그런 생활이니까, 차별한 적도 없어요”
종전 후 그들은 단체로서 귀국했죠. 석탄을 운반하는 큰 배 (団平船, 단베이부네)가 있는데, 그런 배를 2,3척 모아서, 가라후토, 중국,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하시마 소학교에 모아서. 날짜는 다르지만, 새벽 6시에 집합시켜, 우리 다 같이 배웅했어요.
이별은 매우 슬펐거든요. 나카노시마에 배가 들어올 때까지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어요. 우리 서로 안보이게 될 때 까지 손을 흔들고, 그리고 집에 돌아갔어요"
(2016년7월26일 호텔 나가사키 BW프리미어 컬렉션)
“이주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張又順이란 여자도 있었다. 우리 수업이 끝나면 같이 놀고. (중략) 같은 사무소에 취직도 했고. 괴롭히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씨름하거나 싸움하거나. 힘도 체력도 (조선인들이) 더 있었다. 공부는 잘 못 했지만”
(2016년7월26일 호텔 나가사키 BW프리미어 컬렉션)
----경찰관이 조선반도 출신자에 폭행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하시마에 경찰관이 몇명 있었습니까?
“(하시마 경찰소는) 한 곳이고, 경찰관2명, 경찰부장이 한 명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2016년9월18일 나가사키 시민회간)
-----경찰관에 의한 폭행은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허위인 거에요. 갱내에 대해서는, 경찰관이 아니고 보안소의 보안 감독이 담당 해서, 경찰관은 갱외를 담당 했어요. 근본적으로 그것이 틀렸어요” (2016년10월29일 호텔 뉴 나가사키)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