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4NEW

인터뷰 고바야시 하루에 씨와 아다치 기요코 씨 ②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 가토 코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조선사람인가’라고 놀랐습니다”

하시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고바야시 하루에 씨와 아다치 기요코 씨



전쟁 전, 전쟁 후의 식량 사정

――하시마의 전쟁 중·전쟁 후의 식량 사정을 가르쳐주세요. 콩의 찌꺼기를 먹었습니까? 마이니치신문 나가사키 판 (2016년 10월 9일 자)의 "나가사키 평화 릴레이"라는 코너에 1939년부터 하시마에 살았다는 구연철 씨 인터뷰가 게재되어 있으며, "상상했던 생활과 전혀 달랐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불러서 어머니, 형제들과 하시마로 건너갔다", "배급되는 콩 찌꺼기는 썩어 있고 끓여 먹었는데, 설사를 자주 했다", "설사를 해도 나무 막대기로 구타를 당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전쟁 중, 전쟁 후의 식량 사정은 심했습니까?

아다치 우리도 전쟁 후는 콩 찌꺼기를 먹었습니다. 배급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고바야시  고바야시 우리도 설사했습니다. 나도 죽을 뻔했습니다. 전염병이라고 입원하여 격리되었습니다.
아다치 언제?
고바야시 중학교 시절. "힘들었지, 엄마도 없는데"라고 담임 선생님이 울던 기억이 있으니까 엄마가 죽은 직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병원 바닥에 거적을 깔고 그 위에 자고 있었지만,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방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창문에서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울었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밖에서 울기 때문에 나도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만이 음식이 좋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야시 에이다이 "치쿠호·군함도"의 기술에 대해서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사진기록> 치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 후 "(현서점)라는 책에서, 강시점 부부가 "조선인 숙소에 배급된 식량의 약 절반을 노무원이 가로 채우고 집에 가져갔기때문에 그들에게는 나머지 절반 밖에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식량사정이 나쁜데다, 배고픈 노무원이 조선인 숙소 음식을 절반도 가로챈 적이 있었던 것일까요?


고바야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다치 우리 오빠들은 근로과에 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 배급이었습니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바야시 초등학교 5학년까지 우리 가족은 17호동의 5층에 살았습니다.



(출처 : 1939년 11월11일 시미즈 건설 설계자료)


아다치 나는 그때 5살. 아직 엄마 살아 있었지.
고바야시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내가 장녀였습니다. 내가 아침에 두부 가게에 가야 했습니다. 음식이 탈지 대두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사람만이 탈지 대두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것을 먹고 설사했습니다. 쌀을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 유가오마루가 나가사키에서 6시경에 출항하여 7시쯤에 도착하여 빵을 가져왔습니다. 후생 식당 직원이 선착장까지 갔습니다. 빵을 받을 수 없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는 일찍 줄을 지어 두부도 사고, 추운 속에서 빵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 더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너를 좋아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학교 급식은 있었습니까?

아다치 없었습니다.
고바야시  없었습니다. 그때는 집에 가서 먹었습니다.
아다치 학교에서 집까지 비가 내려도 우산없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만큼 가까웠습니다.
고바야시  시오후리마치는 콘크리트로 지붕이 있어 비가 와도 괜찮았습니다. 다카시마 사람과 비교하면, 여성이 나가사키에 오면, 어느 쪽이 다카시마, 어느 쪽이 하시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시마는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해서 햇빛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시마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대요.

하시마의 실지 조사를 하는 고바야시 하루에 씨(사진 왼쪽. 오른쪽:가지 히데오 씨, 중앙:마쓰모토 사카에 씨)

――하시마에서 수도 요금이 공짜 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급수 선박이 매일 물을 들고 왔습니까? 강시점 부부의 증언이지만, "취사장 물동이를 가득하기 위해 아래층의 저수조에서 7층까지 매일 가파른 계단으로 5· 6 번 운반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사람의 일 이었습니까?

아다치 그것은 거짓말. 그 층마다 물을 긷는 곳이 있었습니다.
고바야시  계단으로 물을 운반하지는 않았습니다. 수도는 각 층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무거워서 물을 운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운반하는 아줌마들이 있었습니다. 얼마였을까? 집 기둥에 '正'자를 쓴 종이를 붙여 횟수를 기록하고, 대금은 아버지의 월급에서 공제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그랬을까. 마지막에는 내가 운반했습니다.

――강시점 부부는 "석탄은 많이 있는데, 연료로 배급된 적은 없었다" "석탄을 파고 집으로 가져 가려고 하면, 검사 갱구에서 몰수 당하고", 가정에서는 석탄은 사용 못 하고, "가정에서 사용하는 연료는 다카하마에서 판매하러 온 장작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장작을 구매했습니까?

고바야시  업체가 다카하마에서 구입하고 하시마까지 배에 싣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갱내에서 사용하는 노를 갱 외에서 조립하는 일을 했습니다. 노를 조립하는 소나무의 남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장작 속에 망둥이 가지가 섞여 있는 경우가 있었고, 수지가 피부에 묻으면 온몸이 빨갛게 부어 눈이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조선사람만 이런 장작을 강제적으로 구매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땠습니까?

고바야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조선사람 만 망둥이 가지가 썩힌 장작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망둥이 가지가 섞여있으면, 피부가 붓거나 눈이 아프며, 일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다치 그때는 이미 석탄이었습니다. 석탄은 배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어땠어?
고바야시 무엇이든 배급. 조선사람도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조선인은 섬에 몇명 살고 있었습니까? 하야시 에이다이 씨 책에는 하시마에는 1500여 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아다치 그렇게 많았을까?
고바야시  1500명! 언제?
아다치 어릴 때.
고바야시  있을 리가 없다. 어린이도 포함해서 5~60명 쯤. 조선 사람은 시오후리마치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 전은 목조 주택. 그리고 30호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도 처음 오신 분은 좋은 건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연공을 쌓아가면 순차적으로 1층에 들어가, 다음은 5층으로 이동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남편이 전기 조수가 되었을 때 이동한 방에는 화장실도 있어 욕실은 없었지만, 화장실이 있는 방에 이동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점차 좋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출처 : 1939년 11월 11일 시미즈 건설 설계자료)


아다치 우리도 그랬어?
고바야시 내가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30호동 2층에 있었지만, 하시마 갔을 때는 그랬을 것입니다. 아빠가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점점 좋은 방에 들어가서 결국은 화장실이 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다치 독신자는 독신자 숙소에 있었지?
고바야시  숙소는 1료, 2료, 3료, 4료라는 식이었습니다. 독신자 숙소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별도였습니다. 어른들은 독신자 숙소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처녀 시절이니까요.
아다치 일본인 독신자 숙소도 그랬지?
고바야시  그래요. 젊은 여성이 독신자 숙소 옆을 지나가면 조롱당했습니다. "멀리라도 독신자 숙소 쪽에 가지말고 집으로 가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른 조선인에 대해 특히 엄격해서, 외근 노무 담당자가 감기라도 때렸다는 기술도 있습니다. "갱내 입구의 전주에 온몸을 묶고 앞을 지나는 광부들에게 막대기로 구타를 시킨 일이 있었다"는 학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다치 갱내 입구는 저기일까?
고바야시  근로과.
아다치 내려가는 사람이 꼬리표를 두기 위하여 왔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일반 콘크리트안에 사무소가 있어서, 꼬리표를 받으러 갔습니다. 전주는 없었어요.
고바야시  전선, 전주는 본 적이 없습니다. 콘크리트 속에 끼워 만들고 있었습니다. 위험하지 않도록. 하시마에서 전주를 본 적이 없네요.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 자료관 팸플릿에 대해
~조선인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한 탑, 철창, 서치 라이트~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 자료관의 팸플릿에는 "1890년, 하시마 근처에 있던 다카시마 탄갱을 운영했던 미쓰비시가 인수하여 확장한 이 작은 섬에 5300명이 있었다"고 적혀있지만, 전쟁 중에도 많이 살았군요.

아다치  사실일까?
고바야시  조사하면 좋아.

―― "1916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고 철창이 있는 초라한 건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용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조선인 노동자는 철창이 있는 초라한 건물에 수용되어 있었나요?

아다치 이것은 거짓말. 철창이 있는 수용소를 본 적도 없습니다. 이씨의 집에 간 적이 있지만, 현관에서 들어갔습니다.
고바야시  나도 철창을 본 적은 없어요.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높이 10m 탑도 있었다"라는 설명이 있지만.... 이것은 어떻습니까? 감시탑은 있었습니까?

고바야시  없습니다. 하시마는 담배 피우는 사이에 일주할 수 있다고 불릴 정도로 좁아요. 거기에 세 살부터 전쟁 중에 피난한 1년을 제외하고 45년쯤 살았지만, 감시하기 위한 탑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아다치 터무니없는 것이 씌어 있어. "식당에도 감시가 있고, 일본어를 못하면 도망쳐도 붙잡히고 벨트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등.
고바야시  있을 수 없어. 거짓말이에요.
아다치 감옥이라고 할까, 4조 반 쯤의 경찰 감옥은 있었어.
고바야시  동급생에 이발소를 운영하는 집이 있어서, 그 집 옆이 경찰이었습니다. 30호동 부근이었습니다.
아다치 우리 이발소에 자주 놀러 갔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순서를 기다리면서 한국어로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고바야시  이발소로 갈 때, 경찰 앞을 지나가면 감옥이 있었고, 속이 보였습니다. 언제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끔 취한 사람이 싸워서 연행되는 것을 봤지만, 드물어서 보러 갔습니다. 경찰은 나가사키에서 교대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옥에 들어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보고 있으면, 젊은 순사가 "너희들도 싸우면 여기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면, 아빠도 엄마도 만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무섭다"고 생각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다치 조선사람이 심하게 취하거나 싸우고 감옥에 갇힌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벨트로 구타를 했다는 건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세계 문화 유산 군함도"에 대해~조선인을 감시하는 서치 라이트~

――한국에서 '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라는 그림책이 발매되고 있습니다. 서치 라이트로 섬에서 도망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있었습니까?

그림책에는 섬에서 도주하는 조선인을 서치 라이트로 감시하는 묘사가 있다.

"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 군함도 (19-20 페이지) "

아다치 있을 수 없다. 서치 라이트로 모터 보트를 추격 했대요.
고바야시  영화도 아닌데. 모터 보트? 그 당시는 모두 노로 젓는 배. 그 이외에 유가오마루, 아사가오마루가 있었습니다.
아다치 몇번이나 말하지만, 하시마에서 일어난 것은 그날 중에 섬의 모든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누군가가 심문을 받거나 린치를 당했다는 일이 있으면 "오늘은 저런 일이 있었다"고 금세 소문이 퍼집니다. 전부 거짓말. 이런 것을 확산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고바야시  거짓은 반드시 발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알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기억은 선명합니다.

남독일 신문 기사 내용 -하시마에서의 공양-

――남독일 신문에 "(중국과 한국의) 강제 노동자의 시체는 바다와 폐광에 버려졌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2015년 7월 6일 자 인터넷판). 하시마에서 사망한 사람의 공양에 관해 기억하시는 것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고바야시  백중날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년에 한 번 하시마에서 하나 뿐인 절의 위령제에 갔습니다. 본당에서 큰 묵주를 돌려, 경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줌마들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 때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보면, 뒷방에 낡은 뼈와 새로운 뼈가 50개 쯤, 6단 쯤의 계단에 줄지어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절의 부인에게 "이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현 밖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 조선사람의 뼈"라고 말합니다. "소중히 하세요. 백중날에는 경을 읽고, 아침 저녁은 내가 분향할게요"라고.
아다치 절의 부인은 언니 동급생이었던 혼마 히로야스 씨의 어머님이실까요?
고바야시  혼마 씨의 엄마, 상냥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절에 가게 되었는데, "너는 어린데, 훌륭하네요"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하시마 사람들은 신앙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사람의 유골을 바다에 던졌다든가, 동굴에 던졌다든가, 절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시마의 오락에 관해서

――영화관 등 오락 시설에는 한반도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아다치 모두 좋아하는 곳에 앉아서 봤습니다. 조선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과 똑같았습니다.
고바야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간 사람이 좌석을 잡았습니다. 역시 앉을 수 없으니까. (오락 시설이라면) 清風荘라는 찻집과 술집이 있었습니다. 어제도 통화했습니다. 그 가게의 엄마가 92,3세입니다. 건강하시고 지금은 교토에 계십니다. 어제도 "안녕하세요. 가끔 네가 전화해 줘"라고 연락이 있었습니다.
아다치 그립다. 찻집의 손님에도 조선사람 있었군요.
고바야시  그래, 섬에 하나밖에 없는 찻집이었습니다. 모리 씨와 직원 둘이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가격이 쌌기 때문에 모두 갔습니다. 회사가 찻집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 무렵, 커피는 드물었기 때문에 "清風荘"는 인기 찻집이었습니다. 밤은 남자의 쉼터입니다. 퇴근길에 맥주 마시고, 술 마시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아다치 그 광경이 떠 오릅니다.
고바야시  "清風荘"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교류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선착장에서 귀국하는 조선사람들과 울면서 테이프를 잡고 이별했습니다.
아다치 왜 군함도가 지옥섬이라고 불리는 지 이해 못 합니다.

폐광 후 교류

――폐광 후 모두 흩어졌지만, 교류는 계속하고 계십니까?

아다치 친척을 따라 혼슈로 이사하신 분, 도쿄에 가신 사람, 여러분 다양한 길을 선택했지만,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환경을 꾸리고 일자리를 찾아 자식들 학교 문제도 있고.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고생의 연속으로 어느새 연락도 적어졌습니다.
아다치 나는 몇 명 친구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귀화해서 일본에 머무른 조선사람도 있습니다.
고바야시  "清風荘"의 어머니에,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지만, "힘들다"고.
아다치 조선사람의 얘기는 중요하지만 아쉽네.
고바야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하시마 동창들과 교류회가 있었고, 그리운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몇 년 동안 교류가 없었지만, 만나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잊고 있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宝来亭"이야기 등.
아다치 우리 살던 17호동 1층에 "宝来亭'라는 중국 요릿집이 있었습니다. 소유자는 나카하라라는 일본 이름 이었지만, 귀화하기 전은 이 씨? 부인은 시마바라 사람이었군요.
고바야시  나카하라 씨와 폐광 후도 교류를 계속했습니다. 폐광 후 역 앞에서 작은 짬뽕 식당을 오픈했습니다. 가끔 통화도 해서, "고바야시 씨, 식당은 오늘 쉬는 날이라 놀러 오세요"라는 식으로. 그 당시 아직 아무것도 없는 무렵. 돼지 고기, 게, 중국은 게 요리가 있죠. 저런 것들을 주었습니다. 중국인, 조선인, 관계 없었다. "고바야시 씨, 오늘은 중국에서 입수한 좋은 게가 있기때문에 오세요". 상자에 5개씩 포장하여 10개 있었거든요. 고무로 묶은 상자에 들어있었습니다. 기뻤지요. 나가사키에서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하시마에 있을 때부터 宝来亭에만 데려가기 때문에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우리 남편이 일찍이 돌아가고 그 후, "고바야시 씨, 면이 남아 있으니까 오세요"라고. 보통 그런 것까지 해주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가사키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시마에 있을 때부터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다치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하시마 사람들이 중국이나 조선사람들을 학대 한 건 사실이 아닙니다.

――학대가 없었으면,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소문 만이 퍼집니다.

고바야시  언젠가 반드시 명예를 회복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다치 그럴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을 힘껏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바야시  명예를 회복 할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남성이 많아서 직장이나 학교 등의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잘 생겼다는 이 씨의 에피소드 등 이번에는 여성 시선으로 하시마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설득력이 있고 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주 통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는 것이 기쁩니다.



(출처:군함도 실측조사 자료집 "추록판" 도쿄전기대학 출판)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
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