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NEW

하시마를 전하는 신문보도

역사를 읽는 재료에 하나로서, 신문기사의 검증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보이는 것은, 그 당시 하시마의 실상입니다. 여기서는, 상징적인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조선인 광부 일본 인광부와 난투 1918년<다이쇼7년> 7월 6일

낮잠을 자고 있던 조선인 광부에게 일본인 광부가 시비를 걸어 부상을 입힌 후 사죄했지만, 조선인광부가 복수를 위해 여럿이서 들이닥쳐 대난투. 이 사건으로 일본인 광부 3명이 상해죄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동양 히노데 신문(東洋日の出新聞) (1918년 <다이쇼8년> 7월 11일자)

나가사키 부근의 조선마을 1922년<다이쇼11년>6월8일

당시 하시마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동아일보 특파원의 기사. 「여기서 수백 엔만 모으면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시마에서 일하는 조선인노무자의 증언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동아일보(1922년<다이쇼11년>6월8일자)

석탄에 깔려 4명이 비참한 죽음 1927년<쇼와2년> 5월 24일

하시마 탄광 갱내에서 5월 24일 오전・오후 2회에 걸쳐 대규모 분탄(粉炭) 추락이 일어나 4명이 사망했다. 4명 중 1명이 조선인 광부.
나가사키 일일신문(1927년<쇼와2년> 5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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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침수로 광부 9명 행방불명 1929년<쇼와4년> 1월 5일

5일 오전5시경, 제4갱 제6편 부근에서 갑자기 물이 불어나, 작업중이던 광부1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 가운데 2명이 시체로 발견됨. 부장(副長) 등 각 기술자가 갱내로 들어가 조사와 침수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신식 미국제 크로트 구명장치(クロート救命機)를 사용하여 3명의 구조대가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29년<쇼와4년> 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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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 최대의 가스 폭발 1935년<쇼와10년>3월26일

하시마탄광 최대의 가스폭발사고. 나가사키일일신문에서 호외가 발행되어 사고의 자세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갱내에서 구출작업에 나선 최고 간부가 2차 폭발에 휘말려 사망. 보도에 의하면 30일 석간 시점에서 이 사고에 의한 사망자가 27명에 달한다고 보도. 사망자는 일본인 18명, 조선인 9명이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만에게만 위험한 작업을 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당시 하시마는 총 인구 3천2백명, 작업원 1천명 중 광부가 7백명이다(나가사키 일일신문)

나가사키 일일신문(1935년<쇼와10년> 3월 27일 호외)
나가사키 하시마탄광 가스대폭발 참사 상보
죽음의 2천척(尺) 갱내에 남겨진 7명의 운명
중상 3명 사망. 탄광병원에 수용, 치료중
「안전제일」의 입구 앞에서 고개 숙인 광부들
탄광 최고 간부의 책임감있는 모습. 오가와 부장 이하 책임을 다하다 중상
연간 생산량 25만톤 이번이 가장 큰 피해

  


나가사키 일일신문(1935년<쇼와10년> 3월 28일 석간)
하시마탄광 대폭발 큰 폭음을 내며 발화 사상자 30여명
폐쇄벽이 날아가며 화염이 맹렬히 분출
눈물을 머금고 생존자를 희생시키다. 일단 물을 넣어 소화


나가사키 일일신문(1935년<쇼와10년> 3월 29일 석간)
하시마탄광 대폭발 참화 속보
사망자 23명에 이르다. 수용자 차례로 절명



나가사키 일일신문(1935년<쇼와10년> 3월 30일 석간)
1명만 남기고 사망자 드디어 27명

일선(日鮮)융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다 1935년<쇼와10년> 6월 14일

나가사키현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의 상호 친목을 향상시키기 위해 14일에 「상애회(相愛会) 나가사키현 본부」를 발족시켜, 사세보(佐世保)에서 성대한 발족식이 열렸다. 이 조직은 내지에 있는 조선인의 융화와 구제, 화친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이 기대 된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35년<쇼와10년> 6월 9일)

다카시마, 하시마 탄광 1할 급여인상 1937년<쇼와12년>7월 1일

다카시마・하시마 두 탄광에서 7월 1일부터 일제히 일률적으로 일급을 1할 인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직원도 월봉 100엔 이하의 자에 대해 1할 인상한다고 발표 
나가사키 일일신문(1937년<쇼와12년> 7월 1일)

하시마의 조선인 광부 12명이 도박으로 검거 1938년<쇼와13년> 11월 24일

하시마 탄광내에서 도박을 하던 12명의 조선인 광부를 우메가사키梅香崎 경찰서가 검거했다. 진술에 의하면 조선에서 유행하고 있는 화투놀이로 한판에 10전의 도박을 2백수십여회에 걸쳐 벌였다고 한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에게 급여가 지불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조선인 광부에게도 급여가 지불되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38년<쇼와13년> 11월 26일)

우수 반도인을 채용 1939년<쇼와14년> 12월 9일

내선 융화를 발전시키며, 탄광의 노동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노무자의 대규모 내지 이입을 실시. 11월 하순부터 청년층을 내지로 도항시켜, 나가사키 소개소에 의해 1,500명을 호쿠쇼北松 탄광, 사키토崎戸, 다카시마, 하시마에 알선하였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38년<쇼와14년> 12월 9일)

반도인 광부 속속 모여들다 1939년<쇼와14년> 12월 21일

조선인 광부들이 호쿠쇼北松 탄광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을 나가사키현의 탄광에서 주목하여, 속속 이입계획이 세워졌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38년<쇼와14년> 12월 21일)

 

’웃으며 죽자’ 는 탄광의 혼魂 - 적의 폭탄 아래에서도 뜨거운 현장의 의지  1941년<쇼와16년> 3월 2일

농한기 근로봉사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하시마를 방문한 기자 리포트 속편. 그 중 조선인 광부의 증언이 게재되어 있다. 「일은 아주 편하고, 돈은 많이 벌 수 있어서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동료 중에는 1년에 1천엔 정도의 저금을 하는 사람은 흔합니다」,「우리들도 당당한 일본 국민이니까 내지인과 반도인의 구별 같은건 전혀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 일부 반도인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도 있습니다만, 간부부터 종업원까지 전부 친절하여 아무런 불만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 일일신문(1941년<쇼와16년> 3월 2일)

반도 노무자 격려 위안회  1942년<쇼와17년> 10월 13일

아이노우라相浦 경찰서가 계획하고, 산보産報・협화회 주최로 스모대회, 우승기 쟁탈전을 개최. 11.28~29 각 탄광의 반도인 노무자 격려 위안을 위해 협화회 주최로 마술, 곡예, 영화 등의 위문대가 순회, 정취와 흥미를 돋구는 교화수양을 실시하다.
나가사키 일보(1942년<쇼와17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