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현(長野県) 경찰사 개설 편

분류코드 : Ⅲ-003

발행 연도 : 1958년

 

저작자 : 나가노현 경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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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현경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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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현(長野県) 경찰본부 경찰부 경찰과 나가노현 경찰사 개설 편’ (나가노현 경찰본부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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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과 조선인 노무자의 소동

 

한편, 진주군인 외에 특히 나가노현 경찰이 고생한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태평양 전쟁 종결 당시, 나가노현에는

 

후쿠시마 경찰서 관내

가미마쓰마치(上松町)  274명     오타키무라(王瀧村)  156명

 

마쓰모토 경찰서 관내

나카야마무라(中山村)   497명

 

나가노경찰서 관내

가시와바라무라(柏原村) 121명

의 중국인 노무자가 거주했다. 이들 노무자는 나가노현의 조선인과 함께 ‘전승국인(戦勝国人)’으로 행동하여 또한 전쟁 중의 차별과 압박에 대한 불만도 폭발시키며 더불어 기아상태로 되어 가고 있던 나가노현의 식량 사정 때문에 물자의 약탈이 수반되는 여러 소동 사건이 여러 곳에서 빈발했다. 특히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수많은 문제를 경찰에 던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명한 사건으로는 1945년 11월 도미쿠사(富草) 경찰서 관내 주변의 조선인들이 대거 하여 이 경찰서에 밀어닥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장은 경부 히가시카와 다케오(東川健夫)이었으나 전쟁 시의 엄격한 경제 단속에 반감이 있으며 그중 20여 명이 서장실에 난입하여 히가시카와 서장을 잡아 묶어서 때리고 발로 차는 폭행을 하고 마지막으로는 ‘사과 증문’을 쓰게 해서 퇴거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에 대해 보고를 받은 경찰부에서는 경무과 차석경부 구라이시 미치히로(倉石道広)를 급하게 파견했으나 동 경부는 바로 동서를 방문해 그 실정을 조사한 후 이이다시(飯田市)에 거주하는 조선인 대표 모 씨를 이이다 경찰서에 호출해서 ‘사과 증문’을 반환하게 해서 일단 상황이 수습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후쿠시마(福島) 경찰서 관내 오타키(大滝) 발전소에서 공사 중인 중국인 노무자 270명은 전시 중의 불우를 불식하려고 대거 이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리고 물자를 요구하는 한편 당시 서장이었던 경부 이토 시게오(伊藤重雄), 차석 경부 보 기무라 마사아키(木村真章)에 대해서 ‘산으로 올라가라!’라고 외쳤다. 이는 아마도 2명의 살해를 의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하들이 그 요구에 응하지 않도록 주장하는 한편 일의 중대성에 비추어 경찰 경부 과에는 매우 비장한 속보를 전했다. 따라서 경찰부에서는 경무과 경부보 마쓰시마 유키오(松島幸雄)를 긴급 파견했다. 동 경부보는 마쓰모토(松本) 진주군과 협상하여 기관총 1개 소대를 빌려 동서로 달려갔으나 그 때에는 이미 경찰서 내부에는 중국인은 아무도 없어서 바로 오타키 현장으로 향했으나 현장 부근의 가옥이 방화되어 그 지역의 소방단은 부근에서 잡히는 등 매우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군의 코널 중좌의 중개로 후쿠시마초 이와야여관(岩屋旅館)에서 중국인 대표자와 협상을 하여 그 이후에는 상황이 무사히 수습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 25일에는 중국인 노무자의 송환지령이 발령되었지만 이로 인해서 우선 마쓰모토에서는 나카야마무라의 중국인 497명이, 27일에는 가미미노치군 가시와바라무라(上水内郡柏原村) 재류중인 중국인 121명, 니시치쿠마군 가미마쓰초(西筑摩郡上松町), 오타키무라(大瀧村)의 중국인 443명이 연달아 강제송환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시와바라무라 재류 중인 중국인은 그 송환 열차 안에 있을 때 나카노역에서 내려 송환 수당지급 요구로 불온한 상황이 보였지만 당시 경무과에서는 가지고 있던 예금통장에서 20여만 엔을 인출해서 이를 부여하고 불온한 소동을 사전에 예방해서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히가시치쿠마군 나카야마무라(東筑摩郡中山村) 재류 중이던 중국인 노무자 497명의 동향에 대해서 기술한다.

 

즉 이 땅에는 전쟁 중에 나카지마항공기주식회사의 반지하식 비행기 제조공장을 설립할 목적을 가지고 그 공사의 하청을 구마가이구미(熊谷組)가 담당하고 가나가와현에서 일했던 중국인 포러와 시즈오카에서 일했던 동 중국인 497명을 지휘하여 그 공사 착수 중에 종전을 맞이했으나 그 날부터 그들이 눈에 거슬리는 흉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밤 마쓰모토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강도, 절도, 강간 등의 범죄를 강행하여 시내를 공포 상태에 빠지게 함과 동시에 구마가이구미 현장 감독이 3명 구타를 당해 살해되는 등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당시 마쓰모토 경찰서장은 경시 시마다테 유키오(島立幸雄)이었으나 이 참상을 목격하자 바로 전술한 마쓰모토시 진주미군 사령관 셔맨레허즈브루크 대장에게 보고함과 동시에 그 대응을 희망하여 한편 현경찰부 경부과에는 현 각 경찰서로부터의 응원을 요청하고 약 50명의 응원경찰관의 파견을 요구하여 그 단속을 맡았으나 여전히 그들의 흉행이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1945년 12월 20일 미군헌평대장 코널 중좌 및 영어통역 2세와 경찰서장, 중국어통역준사 가와이 에이지(河合英治) 외 응원경찰관 50명으로 나카야마무라 공사현장으로 찾아가서

 

우선 미군 헌병대장으로부터 그들에게 ‘제군들은 전승국의 영예스러운 국민이며 그 자부심을 언제나 가슴에 안고 일본 체류중에는 절도 있게 행동했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는데 이는 번역해서 가와이준사로 전해져 가와이준사는 이를 중국어로 모든 중국인에게 전달했으나 마지막으로 당시는 아직

 

GHQ지령 756로 형사 재판권 행사에 대한 각서

 

가 발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군들의 불법행위는 일본 형법에 의해…를 덧붙여 승낙하는 자는 손을 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1중대의 가나가와현에서 온 중국인들은 거의 이를 승낙했으나 제2중대의 시즈오카현에서 온 중국인들 사이에 불온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가와이준사는 이 상황을 감지했으나 통역 업무 때문에 미군대장, 경찰서장 등이 귀환한 후에도 현장에 마련된 사방 2간 정도의 판잣집 단속경찰관사무소에서 잠시 휴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폭도화된 수많은 중국인들이 큰 소리를 외치며 가와이준사가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가와이준사는 죽을 각오로 밖으로 나왔으나 나오자마자 바로 거기에 있던 막, 혹은 몽둥이로 여기 저기를 마구 맞아서 머리 피부가 찢어져 선혈이 나서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 후 이 보고를 받은 본서에서는 자동소총을 장비한 미군 1개분대 응원을 얻어 가와이준사를 마쓰모토시내의 후지모리(藤森)병원으로 메이다 넣었으나 그 후에도 중국인들이 자주 병원 밖으로 집단으로 ‘가와이준사가 살아 있다면 다시 세게 때려서 죽이겠다’라고 협박해서 이 병원에서 치료하는 1달 동안 거의 경비경찰관을 이병원에 파견해두어야 하는 등 비상사태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이리하여 중국인 노무자 재류 중에는 여러 사고가 빈발하고 경찰 사무는 매우 심각해지고 주민들도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어서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이 보여졌지만 그들의 송환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 중국인 문제는 수습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