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농촌의 인구배출기구 (일만농정연구회 1940)
일만농정연구회(日満農政研究会)는 만주와 조선의 농업, 농업 관련 환경 및 정책 등에 대한 조사 연구를 실시한 재단법인이다.
이 책은 쇼와 10년(1935)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달리에서 실시된 인구 이동에 관한 조사를 바탕으로 조선 농촌의 노동력이 내지(일본)로 유출된 실태를 검증해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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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농촌의 인구배출기구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달리의 인구 이동에 관한 조사-
- 이동 인구의 수와 그 증감
이 부락의 조선인 거주 세대(쇼와10년(1935년) 국세조사 당시)는 137호, 인구 661명이었지만, 그 중 5세대 인구 20명은 수리(水利)조합 공사 인부의 잔류 인원이며, 1세대 인구 4명은 사업 실패 후 임시 거주 중인 사람들로 쇼와12년(1937년)까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으므로 이를 제외한 정착 세대 131호, 인구 637명(이 중 2세대는 죽세공과 과일 행상인이다)을 대상으로 문제를 관찰하기로 한다.
이 정착 세대에서 외지로 나간 부재 가족(남편, 장남, 장남의 처자, 미혼 자녀, 미혼인 형제자매)의 인원수는 108명으로 거주 인구의 17.0%이며, 이동 세대수는 51세대로 38.9%이다. 이들의 행선지는 내지 54명, 조선 내 53명, 만주 1명이다. 단, 조선 내 53명 중에는 이 부락 내 고용자 12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부락 외부에 나가 있는 부재 가족원의 과반수는 내지에 가 있는 셈이다. 이는 기본적인 가족 구성원만 계산한 것인데, 그 외에 분가 형식으로 나온 사람이 11세대, 35명이며 그 중 6세대 19명은 내지로 갔다. 또한 일가가 모두 내지로 도항한 자는 10세대 29명이며, 이 부락에서 거처를 정리하고 떠나면서(대개 파산한 유랑자이다) 일부만 내지로 건너간 사람은 4세대 19명이다.
이 밖에 이 부락에 일시 거주했다 나중에 내지로 건너간 세대도 몇 가구가 있는데, 이를 제외하고 이 부락에 거처 또는 본가가 있거나, 정착해 살던 사람 중에 현재 내지에 거주하는 사람만 해도 121 명(내지 출생 20 명 포함)이나 된다.
이는 거주 인구의 19.0%(내지 출생을 제외하면 15.9%)에 해당하며 울산군의 5%(쇼와11년(1936년) 말 현재 울산경찰서 조사, 단 밀항자와 내지 출생자를 합산하지 않음), 경상남도의 13%(쇼와12년(1937년) 말 현재 내무성 경보국(内務省警保局) 조사. 단, 내지 출생자를 합산)보다 훨씬 높다. 여기서 보듯 특히 내지 이주자가 많은 것이 이 부락의 특징이다. 이는 이 부락이 내지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이 큰 데 따른 것이지만, 이 부락 출신으로 다이쇼 13년(1924년)에 도항 후 토목 청부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노동자를 모집하고 불러들인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다음으로 이들 인구의 이동 시기와 증감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조선 내로 가족원이 이동한 세대는 쇼와5년(1930년)에는 16세대, 이동한 취업자는 19명, 동반한 처자는 4명이었으나, 쇼와10년(1935년)에는 29세대, 취업자 39명, 처자 14명이었다. 이와 같은 증가가 주로 16세 전후의 유년 노동력의 동원에 기인한다는 것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이다.
신규 출촌자 가운데 15명,새로 마을에 정착한 세대(新来住世帯) 에서 이동한 인구 중 3명을 더해모두 18명이 20세 이하이다.
내지로 간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 쇼와5년(1930년)에는 30세대(그 외에 분가 형식을 취한 것이 2세대)의 가족원이 이동했는데, 쇼와10년(1935년) 에는 3세대가 줄어 27세대였다. 그러나 그동안 새로 도항하여 내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는 오히려 10명이 증가했다. 그리고 분가 및 그 밖의 형식으로 이동한 사람을 포함하면 부락인의 내지 거주자는 쇼와5년(1930년)부터 10년 사이에 30명이 증가했다. 이는 다이쇼13년(1924년)년부터 쇼와4년(1929년) 사이에 증가한 20명보다 많은데, 이 기간에 귀촌자가 특히 많았기 때문이며 단순 도항자 수는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 사이가 가장 많았다. 최근의 경향으로 처자를 불러들이거나 동반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 특히 눈에 띄는데, 이에 반해 남성 취업자의 신규 이동이 쇼와8년(1933년)을 기점으로 급감한 것은 제2표에 나타난 바와 같다. 말할 것도 없이 도항 조건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다수의 후보자는 내지행의 절실한 희망을 품고 온갖 기회를 엿보며 밀항 기도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쇼와10년(1935년)에 불과 1명(그외 처자 3명), 쇼와11년(1936년)에 2명(처자 없음), 쇼와12년(1937년)에 1명, 쇼와13년(1938년)에 3명만 허가되었던 것이 쇼와14년(1939년)에는 내지의 경기 부양과 노무 동원 계획에 따라 14명(동반 처자 42명)까지 급증했다. 여기에 쇼와 14년(1939년)에는 만주로 3명, 조선 내 도시로 3명이 나가 부락의 청년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이동 인구의 세대상 지위와 이동
그렇다면 상기와 같이 이동한 인구는 거주 세대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어떠한 형태로 집을 떠나는가. 이 점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제3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남편 또는 장남이 가장 많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음 단락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경작할 토지를 거의 갖지 못한 자들이 많다. 또는, 다소 소작지를 가지고 있어도 비싼 소작료를 떼이고 얼마 안 남은 수입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뿐더러, 그마저도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매우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부모, 처자를 방치하고 또는 집을 차남에게 떠맡기고 돈을 벌러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내부에서 밀어내는 힘이 약하다는 점과 더불어 특히 내지의 흡인력이 크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장남이 차남에게 집안의 책임을 떠넘기고 과감하게 내지로 떠난 이면에 차남은 상당한 면적의 경작지와 주택을 물려받고 게다가 얼마간의 송금도 받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형을 원망하며 자신도 내지로 이동하겠다고 마음먹는 사례가 많다. 또한 부모 부양이라는 똑같은 목적이라도 연고(年雇:한 해 동안의 머슴살이)로 나가는 경우에는 생활이 궁핍해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반면, 내지로는 기꺼이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내지 거주 노동자에게 시집간 사람이 13명(쇼와11년(1936년)의 3건 합산)인데, 쇼와5년~10년(1930-1935년) 사이의 결혼 22건 중 6건이 내지로 갔다는 사실도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전의 결혼 범위는 기껏해야 2, 3리 이내이고 그 상대는 대체로 농민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내지라고 하면 흔쾌히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사정은 분가에서도 볼 수 있다. 소농에게는 차남 밑으로 약간의 소유지나 경작지를 분양하는 것은 물론 그 결혼 비용조차 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차남, 삼남은 수 년간 (대개는 10년 가까이) 연고 생활을 하며 그 간의 저축으로 결혼을 하고, 고용주나 다른 지주로부터 작은 토지를 빌려 독립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분가 방식이었다. 게다가 농업 인구의 증가와 경지난에 더해 종래의 주종 관계가 느슨해져 연고에서 소작농으로 분가 독립하는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 최근까지의 추세였다. 그럼에도 우연한 내지 노동 시장의 개방은, 소농의 분가에 더 없이 좋은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다.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되는 사람이 후자의 길을 택했음은 물론이다. 제3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분가 이주한 사람이 조선 내보다 오히려 내지 쪽이 많은 이유이다. 분가 형식을 취한 내지 이주자도 도항 초기에는 물론 무배우자가 대부분이었다(성인 중 1인만 처를 동반해 도항했다). 그랬던 것이 내지에서 결혼 비용을 벌어 아내를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현재 세대에서 부재가족원으로서의 차남과 그 동생들도 머지않아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지에서 분가의 수단으로서뿐 아니라 정착지도 찾아내고 있다. 종전에는 내지에서 다소간의 저축을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과 분가를 이루고, 또 토지 구입을 목표로 바다를 건넜지만, 이제 이런 희망은 거의 모두가 버렸다.
내지에서 그들의 생활이 여의치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따라 조선 농촌이 그들에게는 안주할 만한 곳이 못 된다는 점이 근본 이유였다. 권태로운 생활에 더해 특히 강하게 느끼는 조선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구속이 그들에게는 참기 힘든 부분이었다. 따라서 최근의 젊은이들에게는, 출발 당초부터 돈을 벌러 간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자유롭고 활발하게 다른 사회 생활을 희구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이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남편 및 장남의 경우에도 처자를 불러들이거나 내지에서 결혼하여 눌러앉는 사람이 많아져 정착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제3표 참조) . 제2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귀촌자가 격감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동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아예 집을 떠날 때부터 처자를 동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특이하다 할 만한 점이다. 쇼와9년(1934년)에 1 명과 쇼와14년(1939년)에 2 명이 있었다(이런 사례는 쇼와 원년(1925년)과 쇼와6년(1931년)에 각각 1 명, 더구나 파산한 유랑자 뿐이었다). 다이쇼9년(1920년) 이래로 친척 지인에 의해 개척된 지반이 상당히 탄탄해진 한편으로 내지 도항자가 점점 이민적 심리에 사로잡혀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내지 도항 초기에 부인들은, 장남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돈을 벌러 외지로 나가야 한다는 인식보다는 오히려 투기적인 심리가 농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쇼와7년(1932년)까지의 대량 귀환으로 거의 정리되어(제4표 참조), 이제는 내지에 남아 있는 사람도 새로 떠나는 사람도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집'을 떠나거나 '집'을 버리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농민 특히 장남에게 '집'이라는관념은 어떤 것일까. 원래 그들에게 ‘집’이란, 부모 형제 처자에 대한 부양의무로 묶인 구체적 집단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家)'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선조를 모셔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조상에 대한 제사와 조상의 묘가 조선의 상류사회에서 유교의 도덕이 보여주는 만큼의 고마움을 갖게하지 못했다. 따라서 차남 등에게 부모 부양의 책임을 떠넘기지 않은 장남에게 내지 정착을 가로막는 요인으로는 노부모의 생존뿐이지만, 이마저도 무시당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지 이주와 마찬가지로 조선 내 이동에서도 농촌에 기반이 없기 때문에 이주지에서 정착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다만, 조선의 일반적인 저임금은 처자를 불러들이기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내지 거주 노동자에 비해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늦추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순사, 면서기의 하급 공무업 및 도시형 직업으로 이동한 사람은 비교적 빨리 가족을 불러들이거나 결혼하여 안정을 찾지만, 연고의 경우는 불안정성이 매우 심각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임이 연간 벼 3~4섬(상급 연고는 5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근무지에서 처자에게 생활상의 각종 편의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없는 한 처자를 불러들이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 3. 인구 이동의 계급성과 이주지에서의 직업
인구가 이동한 세대를 계층별로 관찰하면 제5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상층 2세대, 중상층 4세대(그 중 2세대는 분가 형식이지만 배출 세대임), 중중층 10세대, 중하층 15세대, 하층 22세대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절대 수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계층별 총 가구 수에 대한 비율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하층에서 인구가 외지로 나간 세대가 많은 것은 경작지의 협소함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제6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층 가운데 8세대는 전혀 경작지가 없고 14세대는 평균 1.9에 불과하다. 하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경작 면적은 급증하지만 중중층 평균 1.8단(1단= 991.74㎡)으로 과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중상층의 18.2단도 차남, 삼남에게 분양할 정도로 크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 계층에서도 인구가 이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상과 같이 계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인구가 이동한 세대수와 비율이 높아질 뿐 아니라, 남편, 장남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절대 수 및 비율도 계층이 낮아질수록 높아지는 것은 제5표에 나타난 바와 같다.
나아가 계층별 고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동 지역과 관련된 계급성이다. 즉, 하층은 내지로의 이동보다 조선 내 이동이 압도적으로 많고, 중층 이상은 조선 내보다 내지 이동이 오히려 많다는 것이다.
내지 이동자 만을 보면 하층 8세대, 중하층 9세대, 중중층 8세대, 중상층 3세대로 중중층까지는 계층이 올라갈수록 인구가 이동하는 세대의 비율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절대 수에 있어서도 중층과 하층은 비슷하나, 중하층은 하층보다 오히려 1세대가 많다. 이동 비율도 중상층이 하층보다 오히려 높다.
이를 내지 거주자에 한정하지 않고, 귀촌자를 포함해 한번 이상 내지에 돈을 벌러 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누면 하층은 14세대, 중하층은 24세대, 중중층은 19세대, 중상층은7세대이며, 각 계층별 거주 세대 수에 대한 비율은 하층 31.8%, 중하층 63.2%, 중중층 70.4%, 중상층 50.0%로 중중층의 비율이 매우 높다.
또한 쇼와10년(1935년) 이후의 내지 이동자 16명, 12세대의 계층성을 보면 중상층 3세대, 중중층 1세대, 중하층 6세대인데 비해 하층은 1세대뿐이다.
내지행에 높은 계층의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은 이 부락만의 특징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쿄부 사회과의 도쿄 조선인 노동자 3,699명에 대한 향리직업조사에 따르면 자작농이 전체의 70.4%에 달한다. 이 결과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로써 일반적인 경향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지행에 높은 계층의 사람이 많고, 조선 내 이동에 하층이 많다면(주:도쿄부 사회과, 재경조선인노동자 현황, 쇼와11년(1936년) 48~54쪽에 따름), 만주로 농업 이민을 간 사람 중에는 중상층의 파산 유랑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부락에서 만주에 농업인으로 이동한 세대는 10여 년 전에 1세대, 20년 전에 3세대밖에 없었지만, 4세대 모두 파산자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 후 만주 이민이 자취를 감춘 것은 내지에서 농업과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갈 사람이 적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최근 만주 이동이 재개되어 쇼와10년(1935년)에 1 명, 쇼와13년(1938년)에 1 명, 쇼와14년(1939년)에 3 명이 있었지만, 모두 농업 이민은 아니다. 즉, 쇼와13년(1938년)에 간 사람은 상업 자영을 위해서 였고, 쇼와14년(1939년)에 간 사람들은 토목 노동자로서 앞서 말한 전신공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로 유출된 세 사람은 모두 내지 도항의 희망을 이루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만주로 갔다는 것이 주의할 점이다.
최근 조선 남부의 농민을 대상으로 한 조선 북부 개척 계획이 이미 이민 유치에 착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자가 적은 것은 만주와 상황이 비슷하기기 때문이다. 하층은 갈 방도가 없고, 중층 이상은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떨어지는 조선 북부의 미개지로 가느니 오히려 만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만주보다 먼저 내지 이동을 선택하는 실정이다. 하층은 만주로 못 가는 것처럼 내지로도 이동할 수 없었고, 중류층 이상은 만주보다 먼저 내지를 희망하지만, 여기서 탈락해 마을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이 만주로 갔다. 이것이 인구 이동의 목적지와 계층의 관계식이다. 우리는 이전 단락에서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되는 사람은 조선 내 보다 내지행의 길을 선택한다고 했지만, 여기에 재력을 더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내지로 도항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층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시도할 여유가 없다. 도항 비용의 조달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도항 편의가 제공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노임이 싸도 손쉽게 그리고 무비용으로 확실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연고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자제의 유년 노동으로 수입을 얻는 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 부락의 미성년 자녀는 단지 부모가 시키는대로 아무것도 모른채 연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연령 상승과 더불어 자아의식이 점차 성장하면 반드시 내지 도항을 지원하는 후보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전에는 연고에서 소작농으로 분가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나, 지금은 내지 노동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어 버렸다. 하층 출신은 이 경력을 쌓아야 비로소 내지 도항 조건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점을 바꾸어 이동 인구의 이주지에서의 직업을 보면 제8표에 나타난 것처럼, 내지에서는 토목 노동자가 가장 많은 19명(거주지를 옮긴 사람을 가산하면 37명), 직공(職工)이 그 다음으로 13명, 운전수 4명, 토목청부업 3명의 순으로 수가 줄고, 조선 내에서는 연고가 25명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다음으로 순사, 토목노동자는 훨씬 적어서 각각 3명씩이다.
내지로 이주한 사람의 직업에 대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우선 첫째로 직공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20세 이하인 사람의 이주로 인해 발생한 새로운 현상이다. 둘째는 운전수가 많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게다가 자본을 많이 들이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입도 많고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이기 때문에 시작하기 좋은 것이다. 직업의 분화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할 점은 계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두뇌를 사용하며 수입이 비교적 좋은 직업 종사자가 많고 하층일수록 순수 육체 노동자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하층은 내지에서 토목노동자보다 직공이 많은 데 반해 하층은 토목노동이 단연 많고, 또 조선에서 중하층이었던 사람 중에 연고 는 한 명도 없고, 면서기, 회사원, 직공, 선원, 토목노동자 등이 뒤를 잇는데 반해 하층은 연고, 접대부가 26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나머지 목수, 토목노동농업 겸 행상 각 1 명에 불과하다. 중중층의 연고 1명은 여러 차례 내지 도항원을 제출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전 분가 형식의 연고를 요청한 것이고, 주점 1명은 상층이 파산하여 중중층으로 재기하기까지의 과정에 일어난 특수한 사례이다. 중중층에는 순사 2 명 뿐이고 상층에는 소농상 자영업자 1 명, 운전수도 1 명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주지 직업에 대한 계급제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만약 부락에 거주하며, 집에 머물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농업과 농촌을 이탈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위와 같은 경향이 한층 뚜렷해지는 것이다. 즉, 해당 부락에서 공무원으로서 울산읍내로 통근하는 사람은 9명(그 중 1 명은 급사, 1 명은 병가, 1명은 임시고용)인데 그 출신 계급을 보면 상층 5명, 중상층 3명, 중중층 1명 등 높은 계층이 독점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당연히 겸업을 일반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이촌성(離村性)이 강한 공무원만을 가지고 논하기로 한다. 실제로 그들은 쇼와11년(1936년)부터 쇼와14년(1939년)까지 8명 중 6명이나 마을을 떠났다. (다만 다른 겸업을 고려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이처럼 상층 및 중중층 이상은 조선 내에서 공무원이 되어 마을을 떠나고, 내지로 건너간 중층 가운데 비교적 상층은 고급 직업, 중하층은 직공 및 토목 노동에 종사하고, 하층은 주로 토목 노동자가 되었다.
그 사이에 만주에는 상층이 자본을 가지고 상업 자영을 위해 가거나(앞서 말한 쇼와13년(1938년)에 이동한 자는 과거 군(郡)의 고용원으로 중중층 출신이지만 장인의 자본을 활용하여 일자리를 포기하고 간 자이다), 혹은 중중층 중에서 특수한 기술을 가진 사람, 혹은 내지행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노동자로 이동했고, (이미 언급한 최근 이동한 5명은 상기 중중층 출신 1명, 중하층 출신 2명, 다년간의 연고 경력을 가진 하층 1명이다) 농업 이민으로는 상중층의 파산자가 나갔다. 이것이 이동 지역별로 본 각 계층과 이주지 직업과의 관계이다.
- 이동 인구의 질과 인구 이동의 영향
이 부락에서 이동한 인구의 질을 관찰하면 다른 지방의 인구 이동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연령별로 보면 제9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내지 도항자는 13세부터 40세까지의 젊은 층이 총수의 79%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부재가족원의 현재 연령별 구성은 제10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16세부터 40세까지가 68.7%(단, 부락 내 이동 인구 12명 제외)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부락 거주 인구는 노년층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생산 노동 인구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나고 있다. 제11 표에 나타난 것처럼 이 부락의 16세~40세까지의 각 계층 간 인구는 모두 조선 전역의 군(郡)에 비해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를 경상남도와 대비하면 부락은 16세~20세, 21세~25세 구간에서 약간 높고, 26세~30세, 31세~40세 구간에서 매우 낮게 나타나, 모두를 합한 16세~40세 인구는 도가 35.3%인 반면 부락은 34.1%로 1.2% 낮다. 울산군에 비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젊은 층 중에서도 세대주인 남성이 옮겨 간 결과는 제12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6세~60세까지, 여자 100명에 대한 동년배 남성의 비율이 조선 전역, 경상남도, 울산군 등 어느 곳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동 인구의 연령과 함께 질적 문제로 고려해야 할 점은 교육 정도이다.
그리고 이 부락 사람 중 새로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높은 비율로 부락을 떠나고 있는지는 제13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즉 초등학교를 다녔거나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 총 52명 중 26명이 내지로 이주했다. 그 26명 중 19명은 쇼와10년(1935년) 10월 이전의 도항자에 속하고, 7명은 그 이후의 이동한 자이다. 나머지 26명 중 조선 내륙과 만주로 간 사람은 18명, 유학 2명, 사망 1명이며, 나머지 5명만 부락에 잔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 5명 중 2명은 주업이 관직이고, 1명은 관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농사일에 정착한 것은 단 2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초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모두 부락에서 나간 것은 요컨대 조선의 농촌 및 농업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들을 붙잡아 둘 만한 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농업을 기피할 뿐만 아니라 농사일이 몸에 배어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과연 조선 농업의 현실이 이를 충분히 수용할 여지가 있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우선 경영 규모의 영세성은 그들의 노동력을 흡수할 여력이 없다. 더구나 전통과 경험만이 지배하고, 게다가 가장의 통제 하에 있는 수공업적 농업에 신참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농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락의 문화 활동에서도 그들은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다. 마을에서 젊은 신참들의 발언권은 노인과 관습의 힘에 의해 봉인되고, 농촌 문화 건설에 열정을 쏟으려는 욕망은 관권에 의해 억압당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촌은 문화적으로는 사막과 같아서 아무런 위안이 없는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이 설 자리가 없다.
그들이 더 나은 삶의 터전과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 거의 모두가 내지 또는 조선 내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이동은 본인들이 원할 뿐 아니라 그 부모들이 기뻐하는 것이기도 하다. 농촌의 부모는 교육받은 자식에게 이런 '비참한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것이 본심이다.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풍습이 지극히 강한 곳에서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농민들은 그 자식이 공무원, 아니면 최소한 관청의 급사라도 되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절실한 희망이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내지로 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신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 부락에서 거의 모두 빠져나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의 전면적인 유출이 부락에 있어서 문화적 저수지의 고갈을 의미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당국은 정책 실시와 산업 지도 장려를 함에 있어 부락내 거점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부락은 새로운 농업 발전에 대한 주체적 조건을 강화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쇼와11년(1936년) 이 부락이 농촌진흥운동의 대상으로 지도 부락에 지정되어 경제적 문화적 재건에 착수했을 때였다. 중견 인물의 부족과 관청 지도에 대한 민간 측의 호응도 부족은 이 부락에서 가장 심각했고, 그 때문에 어느 범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진흥 운동의 효과조차 거두지 못한 채로 끝난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의 이동과 함께 많은 젊은 남성의 유출이 부락 내 노동력 수급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것은 대농에게 일고(日雇:일용직 일꾼)와 연고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했다. 이 일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는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였다. 그 이유는 당시 울산군 및 인근 군에 걸쳐 연고 및 그 후보자가 내지 노동자 모집에 응모해 대량으로 이동했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에 농민이 가장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고 수급이 어려워져 연고 임금이 인상 (상급 연고가 1년에 벼 4섬 정도였던 것이 5섬으로 인상)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물적, 인적 대우가 급격히 개선되어 연고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다행히 이 부락은 내지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북방 오지에서 내륙 도항 지원자가 남하하여, 임시로 연고로 일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연고 수는 청소년을 합하여 36명, 그 중 부락 출신은 12명이다) 어떻게든 필요한 연고는 제때에 충당했지만, 임시직을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의 불안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으며, 또한 연고의 일반적인 소질 저하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인구 유출의 영향으로 더욱 고려해야 할 점은 가족 구성의 변화 및 가족 제도의 붕괴이다.
이 부락의 부재 가족원을 포함하면 가구당 평균 가족원은 5.3명이 되어야 하지만, 거주 가족원의 가구당 평균은 4.5명이다. 한 가구당 거주 가족원이 특히 이 부락에 적은 것은 제14표의 가구 인원 비교에서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원의 축소는 가족 제도의 붕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본래 조선의 가족 제도는 조상-부모-장남-조상의 제사라는 기본 관계를 종축으로, 절대적 가부장권을 횡축으로 하여 짜여져 있는데, 이제 그 장자의 계통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집을 떠난 장남은 조상과 그 묘와 제사가 감사하지 않을 뿐더러 조상이나 생존한 부모에 대한 형식적 의무조차 망각하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장남과 동행한 아내로 오랫동안 내지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 특히 내지에서 맞이한 아내는 옛 가족 제도는 물론 부모를 모시는 3대(代) 가족 조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이 부락의 가족 분열과 가족 제도의 파괴는 이제 시대사상에 의해 증명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돈벌이하러 간 이주자가 송금으로 부락 거주 가족의 경제를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 내 이주자에 대해 살펴보면 연고는 중류층 출신 1명이 분가 비용을 위해 저축하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하층 출신 24명은 대체로 1년치 임금인 벼5말에서 4섬의 대부분을 본가에 보내어 그 경제를 지탱하거나 돕고 있는데 반해, 그 외에는 회사원 1명(연 100엔 미만의 송금)을 제외하고는 송금액이 없는 것이 특이점이다.
다음으로 내지의 현황을 보면, 이전부터 얼마라도 송금을 하는 사람은 9명, 매년 송금을 하는 사람은 9명, 그 1명당 평균 송금액은 54엔(쇼와10년(1935년) 현재, 최고는 100엔)이다. 이는 해당 가구에는 상당한 경제적 원조임에 틀림없지만 부락 전체로 보면 그다지 큰 금액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기혼자가 늘어난 것과 내지 경기가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신으로 돈 벌러 갔던 이주자가 많았던 초기, 그것도 아직 경기가 좋았던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송금 및 가져온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15표에 의해 알 수 있다. 즉 다이쇼 15년(1926년)에는 24명 2,190엔, 쇼와 2년(1927년)에 29명 2,660엔에 달한다. 당시 귀촌한 사람 중 한 명은 천 엔을 가지고 돌아와서 큰 땅을 구입한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특히 다이쇼 13년(1924년)에 연달아 도항하여 토목청부업자로 성공한 3형제는 현재 내지에서 수만 엔의 재산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부락 내외에 1만 수천 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부락에 정착한 형제 한 명을 자작농으로까지 만들어 놓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쇼와4년(1929년) 이후 송금액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쇼와10년(1935년)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15표의 울산읍 전체 송금액의 감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전시 경기의 호황과 신규 도항자의 증가에 힘입어 쇼와14년(1939년) 에는 송금액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여 부락 생활을 윤택하게 만든 큰 요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내지는 이 부락으로부터 많은 인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현재 거주하는 부락인 다수의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요약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 이 부락은 높은 비율로 인구가 이동하고 있으며, 특히 내지로 많은 농민이 나가고 있다.
- 이동 인구 중에는 남편 또는 장남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매우 많다. 이는 내부에서 밀어내는 힘이 강한 것과 특히 내지의 흡입력이 큰 것과도 큰 관계가 있다.
- 내지 이주자의 내지 정착성이 강하다. 처를 동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장남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정착에는 농민의 집에 대한 희박한 관념과 연관이 있다.
- 차남과 삼남에게 내지의 노동시장은 새로운 분가의 방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방편뿐만 아니라 정착할 곳도 찾고 있다. 최근의 젊은 층은 도항 초기부터 영주 의사를 가진 자가 많다. 내지의 자유와 조선 내의 정치적 사회적 구속. 그들의 생활 의식의 상승에 따른 것이다.
- 이동자의 계층별. 이동자는 계층이 낮아질수록 절대적으로도 상대적(계층별 가구 수에 대한)으로도 많아진다.
- 이동자 중 남편 또는 장남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이동도 절대 수 및 비율(계층별 가구 수에 대한)도 높다.
- 이동하는 곳에 계급적 차이가 있다. 내지에는 중층 이상, 조선 내에는 상층 및 하층, 만주에는 상중층 파산자 및 중층의 내지 지망 낙선자.
이 차이는 이동하는 곳의 문화적, 경제적, 자연적 제반 조건을 고려한 선택력(특히 위험부담력, 이동비용 조달력, 생활난과 관련된 기력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 이주지 직업에도 계층이 나타난다. 계층이 올라갈수록 두뇌적 노동에 종사하고,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순수 육체 노동에 종사한다. 내지에서 직공을 많이 배출하는 계층(중하층)과 토목 노동자를 주로 배출하는 계층(1.)의 차이는 주목할 만하다.
- 이동 인구는 젊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 초등 교육을 받은 52명은 거의 모두가 떠났다.
- 인구 유출의 영향으로서, 교육받은 사람을 배출한 결과는 부락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당국의 정책 실시에 큰 어려움을 초래.
12, 젊은 남성들의 유출은 대농이 일고와 연고를 구하기 어렵게 해 연고의 대우 개선 및 질의 저하를 초래.
13, 장남의 이동에 따른 장자 계통의 붕괴, 가족 제도의 파괴와 가족 분열. 특히 내지로 간 맏며느리가 소가족주의적 사상을 가지게 된다.
14, 돈벌이를 하러 간 이주자가 송금으로 현재 거주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 조선 내 이동자는 연고뿐. 내지는 경기 변동에 따른 변화가 크지만 호황기에는 송금액 비중이 매우 높다. 내지 이동으로 성공한 개별적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