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NEW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 –

이 책의 표지에는 “유네스코의 근대화산업군(群)으로서 새로운 관광 명소로 주목 받는 군함도는, 일본 근대의 축도. 조선인·중국인 강제연행 피해자는 지옥섬이라고 부른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내용은, 하시마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하는 조선인 노무자의 증언, 탄광폐쇄후에 하시마에서 찾아서 갖고 간 “화장매장인허증”등을 독자적으로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 책을 간행함에 있어서, 하시마는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역사가 응축한 탄광섬”이라며, “우리는 ‘군함도’의 <세계유산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지만, 전쟁중의 포학의 역사를 은폐해서 그 실현을 도모하려는 풍조를 용인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하시마 도민들이 증언을 합니다.

 

CLAIM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 –

저자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2016년/사회평론사 발간

굴착장은 엎드려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좁고, 숨 막힐 듯이 더우며, 피로가 쌓여 졸리고, 가스도 가득하고 낙반의 위험이 있어서, 이대로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서정우 28페이지
노동은 매우 힘든 데다가, 이렇게 웅크려서 채굴을 합니다. 4년간 그렇게 했더니, 이렇게 등이 구부려져 버렸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6페이지
탄광 내부는 덥고 공기도 나쁜데, 8시간 이상 앉아서 작업을 합니다. 나도 한 번, 산소 결핍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6페이지
일본인은 탄층이 높은, 채탄하기 쉬운 곳을 담당하고, 우리 조선인은 50,60센티의 낮고 좁은 곳에 들어가서, 몸을 옆으로 누인 채 곡괭이와 손으로 파야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유희긍 75페이지
그들은 이곳에서 훈도시(들보) 한 장만을 몸에 걸치고, 서있지도 못한 채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석탄을 캐야만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KBS한국방송 『역사 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2010년 8월 7일 방송) 65페이지
훈도시(들보)를 한 달에 한 벌만 주었는데, 갱내에서는 훈도시 한 장만 입고 일을 했고, 때로는 알몸 상태로 일을 해, 마치 원시 사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4페이지
일본인 광부는 작업복을 지급받았으나, 중국인은 지급받지 못해, 훈도시(들보) 한 장만 걸치고, 짚신을 신고 있거나, 맨발이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지창(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4페이지
회사는 중국인의 목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갱내에서의 신변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늘 부상과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는데도 방치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페이지
낙반으로 인해 한 달에 4,5명은 사망했어요.지금과 같은 안전을 고려한 탄광이 전혀 아니었어요. 
“낙반으로 인해 한 달에 4,5명은 사망했어요. 지금과 같은 안전을 고려한 탄광이 전혀 아니었어요.”
서정우 28페이지
한국인의 작업장은 일본인과 별도 였으며, 갱 밖에서도 거의 접촉이 없었는데, 어느 날, 사소한 일로 징벌형을 받은 일본인들과 만났을 때 ’일본 정부가 빨리 망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전영식 51페이지
일본도를 장비 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이것저것 명령을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서정우 28페이지
일본인 감독이 구타와 학대를 가해서,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른 중국인도 적지 않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페이지
어느 날, 갱내에 가스가 누출되었는데, 일본인 주임 감독은 안에 있는 중국인 노동자의 생사는 개의치 않은 채, 서둘러 갱도의 입구를 막으려고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페이지
탄광장이 어떠한 구명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한을 품은 채 이국 타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페이지
일본인은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본인들이 들지 않고, 중국인에게 모두 들게 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감독이 달라고 하는 도구가 어떤 것인지 몰라서, 도구를 재빨리 건네지 않으면, 감독은 우리를 마구 때렸다. 손 닫는 곳에 곡괭이가 있으면 곡괭이로 때렸고, 삽이 있으면 삽으로 때렸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맞고 살았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지창(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3페이지
우리 조선인은, 이 모퉁이의 구석의 2층 건물과 4층 건물에 살았습니다. 1인당 다다미 한 장 넓이도 안될 좁은 방에 7,8명이 같이 살았습니다. 겉은 모르타르와 철근이었지만, 건물 안은 아주 허름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서정우 28페이지
9층 건물의 가장 아래층인 반지하였다. 일본인들은 거기에 없었다. 별도의 환경이 좋은 곳에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항상 습기가 찼고, 통풍도 안되어 항상 불쾌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전영식 49페이지
거친 파도가 제방을 넘어올 때는, 숙소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자고 있는 사이에 다다미 위의 옷이 젖어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박준구 54페이지
숙소의 창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창으로 되어 있었고, 근처에 감시소도 있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KBS한국방송 『역사 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2010년 8월 7일 방송) 64페이지
틈만 나면‘제2국민’이라 불리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최장섭 44페이지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개, 고양이, 돼지, 짱꼴라(중국인), 조센징(조선인)’ 등의 멸칭으로 불리며 ‘인간다운’ 취급을 받지 못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미지를 향한 조사,「하시마 자료」(하시마, 조선인들의 사망 실태)와 그 해명
130페이지
하루 12시간~16시간의 탄광 노동을 하면서, 식사는 콩깻묵으로 만든 주먹밥 두 개가 전부였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다. 배가 고파 움직이지 못해, 탄차 사이에 끼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KBS한국방송 『역사 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2010년 8월 7일 방송) 64페이지
이러한 중노동에, 식사는 콩깻묵 80%, 현미 20%로 된 밥과, 정어리를 통째 삶아 부순 것이 반찬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설사를 했고, 심하게 쇠약해져갔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서정우 28페이지
식사는’콩깻묵’, ‘납작보리’가 대부분으로 양도 매우 적어서 늘 배가 고팠지만, 4년 동안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7페이지
딸랑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장시간 노동을 했기 때문에, 다들 영양실조 상태였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최장섭 43페이지
쌀은 반도 들어있지 않은, 거의 콩을 섞은 밥이었다. 게다가 양도 적어서, 늘 배가 고팠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박준구 85페이지
가축용 사료인 콩깻묵을 우리에게 먹였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6페이지
죽은, 200명이나 되는 인원에 겨우 냄비 하나로, 작은 종지 한 그릇밖에 먹지 못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6페이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귤껍질을 주워 먹거나, 들풀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도 일본인 감독한테 들키면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6페이지
일터로 오가는 길에 귤껍질이 떨어져 있으면, 몰래 주워 가져가서, 씻어서 먹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들키면 반드시 맞았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지창(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5페이지
임금을 받은 적이 없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최장섭 43페이지
회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정해진 식사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술집과 식당에 갈 수도 없었다.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박준구 56페이지
임금은 60~90엔입니다. 점점 숙련공이 되어 가기 때문에, 임금도 올랐습니다. 송금도 했습니다. (송금이)도착해 있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7페이지
임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마인지 잊어버렸지만, 매월 푼돈 정도의 돈만 주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전영식 50페이지
하시마를 떠나기로 결정이 되어, 미쓰비시는 중국인에게 귀국비용을 지급한다며 수표를 건넸다. 한 장의 종이 위에 무언가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내 것은 800위안(元) 정도의 수표였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지창(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6페이지
일본인 감독이 구타와 학대를 가해서,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른 중국인도 적지 않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페이지
총 20명의 대부분이, 일본인 노동자와 감독들이 가한 폭력, 린치, 학대, 폭행에 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미지를 향한 조사 「하시마 자료」(하시마, 조선인들의 사망 실태)와 그 해명
130페이지
탄광장은 경찰서에 전화해서, 우리의 폭동을 알리고 경관을 불렀다. 7명은 모두 포박당한 채 난타당하였고, 그대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페이지
한 경관이 내 머리를 칼로 치려고 노리며 다가왔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숙여 피하려고 했으나, 목 뒤쪽에 칼을 맞아 선혈이 솟구쳤고,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이경운(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페이지
실제로 많은 조선인이 죽음을 무릅 쓰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헤엄치는 도중에 바다에서 익사하거나, 도중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거나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KBS한국방송 『역사 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2010년 8월 7일 방송) 66페이지
나는 도망칠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붙잡히면, 거의 반죽음을 당합니다. 벌거벗겨진 채로 사정없이 맞았거든요.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7페이지
밴드(끈)으로 무지막지하게 맞거나 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7페이지
칼로 찔리기도 한 상처도 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7페이지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려고 했으나, 도중에 힘이 빠져 붙잡히거나, 육지에 도착해서 붙잡힌 사람도 있는데, 고무끈으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았다.비명을 듣고 달려온 우리 앞에서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했다. 대략 11명 정도로, 그들은 투옥되었는지, 섬에서 사라졌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최장섭 44페이지
동료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이나, 다카하마에 헤엄쳐서 도망치다 익사한 사람 등이, 40~50명 정도 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서정우  29페이지
원폭이 있은 후 20일 정도 지나, 8월 말에 귀국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배가 온다고 했으나, 전혀 오지 않아 발동선에 나무배를 끌게 하여, 3일 걸려 부산에 귀국했습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김선옥 38페이지
회사는 우리를 귀국시킬 준비를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음력 8월에, 가족이 있는 동포가 준비한 암선을 타고 귀국한 것이다. 마치 거지 꼴을 하고... 지붕이 없는 작은 배로,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30~40명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전영식 52페이지
어쨌든 빨리 귀국하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 암선도 상관없다며 동료들과 얘기해서 목조선을 발견했으나, 너무 작아서 불안했다. 누가 알선해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선장은 러시아에도 왔다 갔다고 해서, 돈을 조금씩 모아서 빌리기로 했다.희망자가 모두 승선하지는 못했다. 선장한테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회사가 준비해 주지도 않았고, 돈을 받은 적도 없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박준구  58페이지
일본인이 통통배 같은 것을 준비해 주어서, 고토를 경유해서 마산에 도착했다. 1945년 11월 5일이었다. 도중에 고토 부근 바다의 파도가 높아 위험했기 때문에, 고토에서 1박 했다. 귀국 시에 탄광 측이 50엔을 주었으나, 마산에서 도둑을 만나, 무일푼이 되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최장섭 46페이지

DISPROOF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 –”
을 검증한다

증언1 굴착 자세에 대해서
증언2 굴착 복장에 대해서
증언3 갱내의 안전확보에 대해서
증언4 부상 시 처지에 대하여
증언5 작업 동료와의 관계에 대해서
증언6 가스 유출 사고에 대해서
증언7 갱내의 작업 분담에 대해서
증언8 조선인의 주거에 대해서
증언9 조선인의 차별에 대해서
증언10 노동시간과 초라한 식사에 대해서
증언11 임금에 대해서
증언12 학대에 대해서
증언13 경찰에 대해서
증언14 섬 탈출에 대해서
증언15 조선인의 인양에 대해서

증언: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
이노우에 히데지, 모리 야스히로,츠보우치 미츠오키, 혼마 히로야스,
타다 토모히로, 마츠모토 사카에, 코바야시 하루에, 아다치 키요코,
사사야마 이사무, 카지 히데오, 나카무라 요우이치,이시카와 아즈마,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가 발간했습니다. 고 오카 마사하루씨, 고 다카자네 야스노리씨, 고 시바타 도시아키씨가 공동집필하고 있습니다. 오카씨는, 조선인 피폭자의 실태조사와 구원을 위해서 분주한 운동가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카자네씨는 나가사키대학의 명예교수로서,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설립에 진력 하였습니다. 시바타씨는, 한국영화 “군함도”의 제작 자문을 맡은 일본인으로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자료 제공 : 국립 국회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