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의 빛
석탄의 빛 1960년 6월
냉한수필(冷汗随筆)
‘다리가 있는가’
이와시타 규조(岩下久蔵)
석탄의 빛 1955년 3월
이 사람 저 사람
갱도보수기술 담당 니시야마 데루이치(西山照市)씨(하시마(端島))
석탄의 빛 1954년 6월
릴레이 방담 제5회 히라이 히로시(平井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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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의 빛 1960년 6월
냉한 수필(冷汗随筆)
이와시타 규조(岩下久蔵) ‘다리가 있는가’
냉한 수필(冷汗随筆)
‘다리가 있는가’
이와시타 규조(岩下久蔵)
(하시마(端島) 갱무기사)
오랜 갱내근무를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무서운 추억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은 나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자 오히려 사고에 직면하더라도 절대로 당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까지 되었다.
굉장히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이야기는 193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번 그룹의 입갱은 당시 아침 6시였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파고 내려가는 6번째 지선 갱도의 12자 전면 동시채굴 방식 (右卸左六片十二尺全層払)의 채탄 현장에서 재료 배치를 마치고 우리가 석탄을 자르기 시작한 순간, 갑자기 채굴 현장 중앙부의 천장이 깨져 오래된 갱도(古洞)의 물과 광재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너무 빨라서 컨베이어 갱도로 통하는 작은 석탄 출입구는 금방 막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갈 길을 잃어버렸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은 저(당시 채재(採災) 숙련작업원(先山), 27세)와 조선인 장리(張里)씨(오장(伍長) 숙련작업원(先山)), 그리고 조선인의 백준(白淳)의 3명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 넘쳐나오는 물은 사정없이 광재를 흘리면서 우리의 다리 밑을 씻고 밑에 쌓이기만 했다.
공간은 조금씩 좁아지고 ‘이제 끝’이라고 각오를 했다. 백준은 울부짖고 말았고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의외로(하늘이 도와준 건지) 수량이 줄어들고 흐르는 속도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잘됐다. 이건 살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겨 장리씨도 모두를 격려하고 일단은 광재를 막기로 했다. 3명이 목숨을 걸고 하는 작업. 서로 그야말로 진검승부였다.
그러나 차단된 채굴장 내부 온도는 올라가고 가스도 있어서 작업은 굉장히 난항을 겪었다. 공기파이프에서 가끔 나오는 신선한 공기를 3명은 입을 모아 나눠 마셨다. 당시 11시가 되면 공기는 멈추기로 되어 있었다.
‘이게 멈추면 이제 정말 끝이다’ 말할 수 없는 초조감이 다시 3명을 사로잡았다.
공기 압력이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11시 반이다’라고 확인했을 때 갑자기 공기가 세게 나오기 시작했다. 직관적으로 구원대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우리는 틀 부분을 때리며 신호를 계속 보냈다.
이리하여 4시간 반의 고투 끝에 3명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광장(鉱長) 이하 걱정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한테 축복 인사를 받고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고 현장까지 와 있던 의사와 간호사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갱도에서 올라간 내가 처음 들은 말은 ‘당신이 다리가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탄광 밖에서는 절망시된 우리를 위해 벌써 관도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탄의 빛 1955년 3월
이 사람 저 사람
갱도보수기술 담당 니시야마 데루이치(西山照市)씨(하시마(端島))
니시야마씨를 방문하기 전에 직접적인 담당자인 갱무 후나즈(船津) 기사에게 니시야마씨가 갱도 내부에서 일하는 모습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어쨌든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누구든 그의 밑에서 업무를 하려고 희망합니다. 업무 자세는 부지런하고 기술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래서 가정의 니시야마씨를 취재하려고 17호 7층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먼저 니시야마씨의 취미부터 물어봤더니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낚시라고 한다.
‘뭐니뭐니 해도 대물이 걸렸을 때는 스릴 만점이고 세상의 일들을 완전히 잊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장기, 바둑을 즐기는 정도로 아주 수수한 분이다.
일요일에는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이가 외둥이라 가급적 아이와 같이 보내려고 노력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나가사키(長崎)로 가족과 같이 나갑니다’
또한 부인을 위해서 장작 패기를 하고, 업무도구의 정비도 일요일의 일과라는 식으로 어디까지나 일이 중심인 사람이다,
인상 깊은 추억
전쟁 중에 중국인 관리 업무를 했을 때, 채굴현장이 깨져서 허리보다 아래쪽이 묻힌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도망갔지만 서너 명의 중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류애’라는 거죠. 구출된 잠시 후에 크게 무너져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후타고(二子)발전소 폭격으로 정전이 발생하여 2갱도 밑의 펌프가 위기에 빠졌지만 전기가 돌아와서 부활되었을 때의 기쁨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탄갱을 사랑하고 탄갱에서 사는 니시야마(西山)씨는 이렇게 말했다. Y・I
석탄의 빛 1954년 6월
릴레이 방담 제5회 히라이 히로시(平井浩)
릴레이 방담 제5회
후타고(二子) 근로과 히라이 히로시(平井浩)
제1회 오쓰보유지로(大坪雄二郎)씨, 제2회 이와사키다이라(岩崎平)씨, 제3회 기무라다네쓰구(木村種次)씨, 제4회 이마무라겐조(今村憲三)씨에 이어 이번에는 히라이 히로시(平井浩)씨가 등장한다.
1929년에 입사했기 때문에 만 25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다카시마(高島)밖에 모른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이를 거듭해 왔다.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일을 말하자면 종전 당시 종업원의 대부분이 반도인이었으며 여기 다카시마에도 600여명의 반도인이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송환해야 한다고 해서 약 350명을 2척의 범선에 태우고 무라사메마루(村雨丸)가 끌고 부산까지 직접 항해하게 되었다.
선장은 노무라 사키치(野村佐吉)씨, 수송지휘관은 제가 맡았다. 뭔가 영웅적인 기분에 지배되면서 당시 이노우에(井上)부장(副長)들이 배웅나온 가운데 1945년 8월 25일 오전 7시, 그리운 다카시마를 떠나 3.5노트라는 소 걸음과 같은 느린 속력으로 부산을 향했다.
중간에 세토(瀬戸)에서 1박하고 새벽에 바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이키(壱岐)를 넘어 쓰시마(対馬) 부근에서 조금 파도와 바람이 거세졌다. 저녁 식사를 거르고 계속 달려 오후 7시경 무사히 도착했다. 부산항에 들어가자 폭발음이 계속 들려 무슨 일이냐고 걱정돼서 보니 다이너마이트로 생선을 잡고 있었다. 작은 배들이 폭발이 일어난 위치로 모이고 있었다. ‘맙소사’하고 일단 안심했다. 바로 전원들을 상륙시켜 서로 건투를 약속하고 각자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륙해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인의 생기 없는 얼굴, 반대로 반도인의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얄궂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 1간마다 아줌마 손으로 한됫병과 컵으로 팔리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차를 보니 의류가 산더미처럼 실려 있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상인이 종전과 동시에 시장에 내놓은 것으로 보였다. 진주군이 바로 온다거나 밤의 통행은 위험하다거나 일본인 경찰이 폭행을 당해 죽었다 등의 소문이 가득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갈 것으로 모두 의견을 모았기 때문에 부산의 미쓰비시 상사, 경찰, 난민수용소(난민이라는 것은 일본인입니다)등을 방문하여 돌아갈 배에 대한 교통편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한심하게도 일본인이 일본인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에 보낸다고 해서 고액의 운임을 받고 태우다가 중간에서 사람을 바다로 던진다거나 화물만 빼서 조선의 어딘가에서 사람을 내보낸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민수용소 위병과 말싸움도 해봤지만 해체된 일본군 위병으로는 소용이 없었고 나가사키현 사람들을 권유해봤지만 소문때문에 믿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상사의 하물과 약 40명의 경찰관 및 그 가족, 병사 등을 태우고 돌아왔다.
당시를 생각하면 비통함이 떠오른다. 일본인이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것을 더 철저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본 역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는 지금, 민족의식을 한층 높여 현단계를 충분히 인식해 두지 않으면 부산의 난민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전 당시 이상의 고난을 겪게 돼 영원히 3등국의 생활을 계속해야 하게 될 것이다.
생각난 대로 글을 써봤지만 다시 읽어보니 무엇을 써는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다. 글을 쓰는 일은 1년에 한번 정도 밖에 없어서 양해를 바란다. 다음은 다시마공작과의 와타나베우시마쓰(渡辺丑松)씨에게 배턴을 넘기고 나는 퇴장하기로 하자.
석탄의 빛 1949년 6월 릴레이 방담
이마무라 교조 (今村恭三)‘패전과 반도인(半島人) 노무자’
릴레이 방담 제4회
‘패전과 반도인(半島人) 노무자’ 서무과 이마무라 교조 (今村恭三)
이번 릴레이 방담은 본지 제52호에서 유가오마루(夕顔丸)의 기무라(木村)선장으로부터 배턴을 이어 받은 후생과의 오카무라(岡村)씨가 퇴직하셨기 때문에 그 동안 중단되어 있었지만 이번 달의 이마무라(今村)씨부터 다시 손보이게 되었다.
8월 15일의 포츠덤선언 수탁 방송 이후 반달이 지난 오늘, 반도인은 기존과 전혀 다른 바가 없고 가동률 92%의 성적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오늘도 오히라(大平)소장으로부터 복원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반도인들을 머물게 하도록 요청을 받았었다. 홋카이도 방면에서 시작되어 바로 2,3일 전에는 규슈까지 반도인 노무자의 집단폭행 사건이 확산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 탄갱에도 뭔가 불온한 분위기가 나타나지 않는지 불안해 하고 있었다. 반도 관리 전임자로 뽑혀서 본점에서 왔다는 중대한 사명을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커지기만 하고 그날 이후 계속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느끼고 있는 패전의 슬픔과 더불어 나에게는 이중의 고통이었다. 머리 속에는 그들이 송환되는 날까지 평온하게 지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했었다.
‘선생 있어?’
‘뭐냐?’
‘우리들의 돈을 맡아 주세요’
‘당신들이 어떻게 했어?’
‘일본이 져서 우편국이 돈을 지불하지 않게 되잖아요. 우리들 예금을 찾아서 가져왔어요. 맡아주세요’
‘일본은 져도 당신들의 돈은 꼭 지불해줄 거야. 이자까지 붙여서. 걱정마셔’
그들은 그들의 상식에 따라 정부의 지배력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정부보다 자신을 믿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웃기기도 하고 또한 반갑기도 했다.
‘선생으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두고 가요. 도둑이 들어오면 선생은 다 못갚을거야’
그들은 서투른 일본어로 잠시 이야기하고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이리하여 제3 유코료(勇興寮)의 기숙사생 뿐만 아니라 7갱(坑) 기숙사생까지 바꿔가면서 돈을 맡기러 왔다. 당시 돈으로 3만엔 이상이라는 돈은 큰 돈이라 그 조치에 정말 곤란했다.
9월 중순이 되었다.
얼굴을 볼 때마다 귀국 날짜를 물어보는 사람이 하루하루 늘어났다.
‘선생님, 돌아갈 배가 없다면 불법 쪽배가 와카마쓰(若松)에서 나간다고 하는데 그걸로 돌아가도 되냐’
불법 쪽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조선까지 안가고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연안의 외딴 섬에 배를 정박시켜 여기가 조선이라고 해서 상륙시켜버리는 나쁜 선장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조선의 시골에서 데리고 와서 정성껏 키워서 수년간 나를 잘 신뢰하고 패전의 오늘날까지 열심히 일해준 그들.
그동안 많은 동료들이 객내 작업이 싫어서 도망갔는데 오늘까지 따라와 준 그들을 어떻게 불안한 불법 쪽배로 보낼 수 있겠는가. 그들에 대한 나의 마지막 전별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조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 즈음 사키도(崎戸), 다카시마(高島)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배를 이용해서 송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호죠(方城)에서도 불법 쪽배를 이용해서 계속 출발시키고 있었다. 한 편으로 신뉴(新入)에서는 나를 믿어서 그런지 너무나 평온하고 그리고 가동률도 여전히 놀랄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간부의 생각은 역시 머물게 한다는 방침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머물게 하는 것은 주변 사정이 하락하지 않았고 하루하루 변해가는 그들의 동향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혼다(本田)씨와 같이 부장(副長)에게 직언했다. 몇 번 회의를 거듭한 후 10월 말로 일단 전원을 해고하고 철도국의 수송계획에 맞춰서 송환하기로 했다.
계획수송은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것이 꽤 어려운 일이며 질서 있게 진행된 것은 신뉴(新入)외에는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 뒷면에는 다나카구라키치(田中倉吉), 모치다진사부로(望田仁三郎) 제형의 남다른 노력과 고생을 잊을 수가 없다.
10월이 되자 아니나다를까 가동률도 크게 떨어져 그 때부터 소의 밀살과 술 밀조가 특히 활발해졌다.
어느 날 취사장에서 느릿느릿 들어온 조(曹)가 ‘선생 살이 빠졌네. 쇠고기 가져왔으니 이걸 먹고 힘네’라고 말하며 찌부러진 도시락통을 꺼냈다. 지져분하기도 해서,
‘선생은 괜찮으니 니가 먹고 힘을 내라. 돌아갈 때까지는 소중한 몸이니까’
조(曹)는 얼굴이 빨개져서 화를 냈다. 내 얼굴을 읽어냈을 것이다.
‘선생, 지저분해서 안 먹는 거야? 도시락통 깨끗히 씻었어. 나리가 전쟁에서 져서 계속 살이 빠졌어. 우리는 걱정하고 있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정도로까지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미안하다고 입안에서 말했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사하게 잘 먹을게’ 그 뒤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曹)는 화를 풀고 돌아갔다.
드디어 그들이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맡은 돈과 함께 전쟁 중에 만든 카키색 국민복 여섯벌을 아내가 정장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별로 전달했다. 동료의 모치다(望田)군도 마찬가지로 흰 와이셔츠까지 보낸 모양이었다.
탄갱을 떠나는 전날, 석동막(石東幕)이 찾아왔다. 그는 홋카이도 전환의 반도인으로 일본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순박한 남자이었다. 홋카이도전환노무자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종전 1년전에 집단으로 전환해왔는데 탄갱에 오자마자 도박과 싸움을 반복하여 끝내 도망가는 식으로 해서 가동률이 50%를 넘을 일이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S노무과장도 힘겨워 하다 남은 사람들을 너의 부서로 이동시켰다.
나는 반도인이 애정만으로는 이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오랜 조선생활에서 체험했었다. 그래서 그들을 받아드린 것과 동시에 강력한 지침과 결의를 제시하여 항상 엄숙한 태도로 임함과 동시에 한 명 한 명에 대해 애정을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게 성공해서 지금까지 성적이 안좋았던 그들이 갑자기 입갱률이 90% 가까이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주는 계속 발생했고 그 때마다 과장에게 보고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끝까지 남은 것은 석동막이었다. 탕갱의 격무의 틈새시간에 마당의 채원에 씨를 뿌려주고 오이의 떡잎이 발아했을 때에는 자기 일처럼 펄쩍 뛰어오르면서 기뻐한 것도 그이었다. 그 석동막이 ‘부인님의 아드님을 업고 가도 괜찮아?’라고 물었다. 아내가 ‘괜찮아’라고 대답하자 기뻐하면서 당시 4살이었던 장남을 업고 나갔다. 그 대로 몇시간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된 건지 걱정하고 있더니 이제 돌아왔다. 등의 아이를 보니 그가 사준 것으로 보이는 장난감을 안고 그대로 푹 자고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맡아 ‘대단히 고맙소’라고 인사하면서 그를 보니 눈에 눈물이 넘쳐나면서 ‘부인님 사진 주세요’라고 말했다. 전쟁 중에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가족 3명이서 찍은 사진을 아내가 건네주었다. 한참 사진을 손에 들고 보고 있던 그는 기쁜 표정으로 품에 넣고 옷 위에서 탁 떼리고 인사를 하면서 돌아갔다.
다음 날은 아내도 오리오(折尾)역까지 배웅 나가 이별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배가 출범할 때까지 3일 동안 항구의 소자갈 위에 대자리를 깔고 별을 보면서 보냈다. 탄갱에서 정산을 못해 항구 역 2층을 빌려 모치다(望田)군들이 퇴직금 기타 수당이 계산되어 각각 전달이 되었는데 이것조차 밤새 해야할 어려운 작업이었다.
드디어 그들이 출범하는 시간이 되었다.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트랩을 올라갔다. 동라 소리가 울리고 배는 미끄러지듯 조용히 출거해 갔다. 그들이 계속 꿈꾸던 조국을 향해서. 갑판 위에서 좁쌀만큼 작아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고 현해탄 박모 속에 살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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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후타고(二子) 근로과의 히라이(平井)씨에게 뒤를 이어주시길 바랍니다.(이마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