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갱부는 언제부터 희생자가 되었나-100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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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연도 : 2017년

전쟁 전~전쟁 후의 주요 신문기사, 다양한 서적의 기술을 해설.

저작자:정대균

Author
정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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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갱부는 언제부터 희생자가 되었나--100년의 궤적

 

                                    정대균(슈토대학도쿄 명예교수)

 

I 전쟁 전 일간지 기술

 

전쟁시기에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 갱부가 최근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의 ‘희생자’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특히 한국에서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최근 간행된 윤문영 작가의 ‘군함도-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우리교육, 2016년)이라는 동화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위안부 ‘소녀상’시대의 ‘조선인 갱부상’이다.

 

1 <군함도-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

‘전쟁을 일으키고 미치광이가 되어 가던 일본은 우리 땅의 어린 소년들까지 강제로 자기 나라로 끌고 갔어요. … 목적지도 모른 채 쇠돌이가 끌려간 곳은 바로 지옥 섬 <군함도>였습니다. 어린 소년들은 땅속 천 미터까지 내려가 일본이 전쟁 자원으로 쓸 석탄을 캐내야 했어요. 사십오 도를 넘나드는 찜통더위 속에 몰아넣고는 달랑 주먹밥 한 덩이를 던져 주며 매일 열두 시간씩이나 일을 시켰어요.’

 

이렇게 그려진 소년과 한국 정부가 말하는 ‘강제노역자’ 간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저지하고자 한국 외교부 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빼앗긴 조국, 끌려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영문책자 기술의 예를 보겠다.

 

2 <빼앗긴 조국, 끌려간 사람들> (Stolen Country, Abducted People)

전쟁 시의 국가총동원 체제 하에서 사람들은 물자 등 자원처럼 다루어졌다. 일본은 노동력 부족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충하고 많은 조선인을 군수산업과 벼농사 확충을 위해 강제 동원했다. 그들은 ‘모집’ ‘정부 알선’ ‘징용령’ ‘근로 보국대’ 등 각종 방식으로 동원되었고 조선 북부의 공업지대, 일본, 만주, 중국, 남태평양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동원되었다.

조선인은 일본인 노동자가 피하는 위험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일에 배치되어 민족차별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괴로워해야 했다. 조선인 노동자는 참을 수 없는 환경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 수입에서 강제저금이 부과되었고, 일본은 아직 이를 청산하지 않았다.

 

사진  일본 치쿠호탄광에 끌려간 노동자의 품에서 장례 시 발견된 가족사진

    탄광 안에서 드러누운 상태로 곡괭이로 석탄을 캐는 조선인 갱부

   일본인 공무원이 사무소 앞에 모인 조선인에게 ‘징용’에 응하도록 권하는 장면

 

피해자로서의 ‘애처로움’이 전해지는 1의 ‘어린 소년들’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1, 2 모두 ‘사악한 나라 일본’을 표상한다. ‘사악한 나라 일본’은 보통 ‘일제’라고 불리는데 오늘날 한국에서 전해지는 ‘일제’의 이야기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그늘’이 투사된 것이고 일본의 ‘악’과 ‘부정’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이는 통상적인 일본 체험에서 생긴 일본 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조선인 갱부가 예전부터 ‘무구한 희생자’로 묘사된 것은 아니다. 일단 여기서 전쟁 전에 주로 조선에서 간행된 신문기사(민족신문 및 어용신문(御用紙))를 참조하여 당시 ‘내지’에서 일한 조선인 갱부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개관하고 후반부에서는 전후의 일본과 한국에서 간행된 단행본을 주요 자료로 삼아 개관함으로써 1과 2의 담론이 한국에 생겨난 경위를 살펴본다. 먼저 조선의 신문에서 아마 하시마 탄광을 포함한 나가사키 해변 탄광의 조선인 갱부에 대해 처음으로 크게 언급된 기사이다.

 

3 <장기(長崎) 부근의 조선촌> (‘동아일보’ 1922년 6월 8일 자)

조선사람 로동자를 오백 여명이나 사용한다는 삼능탄광회사(三菱炭鑛會社)의 상황을 보고자 기자는 어느 날 오후에 장기 시외 고도촌(高島村)을 향하얏다. 배를 타고 조선리수로 오십 리쯤 나아가면 수목이 무성한 섬에 탄광 굴뚝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오른다. 이곳에는 조선인이 대략 일백 칠십 명 가량이나 사는대, 그들은 모다 회사집에 수용되얏슴으로 별로 집으로 근심하는 일은 업고, 하로 잘 벌면 이 円의 삭전을 밧는대, 먹기는 회사에서 공동으로 밥을 지여 실비 사십 젼을밧고 먹이고, 의복은 로동자이닛가 별로 돈이 들지 아니하야, 당자만 잘하면 돈을 모을 수 잇슴으로 이곳에 온지 이삼 년 동안에 오륙백 円의 돈을 버러 고향으로 보낸 사람이 잇다 하며, 로동자 중 처자까지 다리고 온 사람은 그 아들들을 현재 심상소학교에 입학식히엇다는대, 성적이 매우 좃코 특별히 어학의 재조가 잇서 십여 세의 어린아해가 일본말을 류창하게 함으로 자기 어머니의 통역을 하야준다 한다. 고도촌에서 잠간만 더 가면 이자도촌(二子島村)이라는 섬이 잇는대, 이곳에도 조선인 항부(坑夫)가 근 이백 명이 잇스나 생활 상태는 전기 고도촌과 틀님이 별로 업고, 그곳에서 대략 조선리수로 십 리가량을 더 나가면 총평수가 일만여 평쯤 되는 적은 섬이 잇스니 이곳이 단도(端島)라 한다. 이곳에도 조선인이 일백팔십여 명이나 사는대, 낫이면 깁히가 백여 길이나 되는 석탄 구덩이 속에 드러가서 일을 하고 밤이면 회사집에서 자며, 그중에는 살님을 따로 하는 사람도 몃 집이 잇서서 이곳에서는 어더 볼 수 업는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부인이 구석구석에서 밥을 짓고잇다. 낫이면 삼백 척이나 깁흔 흙구덩이 속에 드러가서 생명이 위태한 석탄캐기로 일을 삼고 밤이면 망망대해의 물결소래만 처량히 들니는 중.

타향사리를 하는 그들의 감상은 엇더한가. 그중 엇던 사람의 말을 드르면 타향에 세월이 지리하다 하야도 우리에게는 엇지그리 빠른지요. 내가 조선서 온 지가 엇그제 가튼데 어늬듯 륙 년이 되엿슴니다. 조선도 아마 만히 변하엿겟지요. 학교가 만히 이러난다지요? 학생이 만하젓다지요. 때때로 오는 고향 친구의 편지를 보면 매우 반가운 소식도 만하요. 이곳에서는 제가 힘드려 일만 하면 먹기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업고 조선 잇슬 때에는 경찰관의 학대에 견댈 수가 업더니 이곳은 그러치는 안슴니다. 자식은 모다 심상소학교에 보냇슴으로 일본말은 잘하지마는 조선말은 모름으로 집안에서는 되도록 조선말을 쓰게 하옵니다. 삭전은 이 円을 버는 사람은 석탄 구텅이 속에 드러가서 일을 하는 것이요. 밧게서 일하는 사람은 일円 이삼십 銭밧게 벌지 못함니다.

이곳에 온 사람은 경상남북도 사람이 뎨일 만코, 그 다음은 전라남북도, 그 다음은 충청도이요, 경기도 사람은 매우 적슴니다. 이곳에서 몃백 만 돈을 모흐면 곳 고향으로 도라가는 이가 만슴니다한다. 아모리 생활곤난으로 오기는 하얏스나 낫이면 토굴 속에서 일하고 밤이면 가업는 바다의 물결소리만 처량히 들니는 중에, 덧업시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 그들의 얼골에는 모다 일종말로는 형용할 수 업는 처량한 빗을 띄웟더라(장기특파원).

아래는 계획동원이 시작되기 이전의 1920~30년대 조선의 신문에 기록된 조선인 노동자의 기사의 예이다. 공적 담론에 ‘사악한 나라 일본’이나 조선인의  ‘희생자성’이 나타난 예가 있는건가.

 

4 <조선수해 의연금> (‘부산일보’ 1925년 9월 2일 자, 일본어판)

나가사키현 다카시마탄광에 종사하는 조선인 동포로부터 조선수해 의연금 434을 수령. 기부한 이들의 이름(생략).

 

5 <九十 밀항단 출발타가 발견> (‘동아일보’ 1932년 5월 5일 자)

부내 범일정(凡一町) 리종구, 곽경학, 서점숙, 리기수 외 四명은 공모하야, 로동하랴는 로동자 八十三명을 모아 매인(毎人)압 도항료(渡航料) 十二円씩을 밧고, 지난 一일 밤 동래군 사하면 감천리 해안에서 二척의 발동선(發動船)으로써 일본으로 밀항하랴다가, 수상경찰서원에게 발각되어 주모자 八명은 인치취조중인데, 八十三명에게 바든 료금 합 九백여 円은 벌서 소비되고 업슴으로, 피해자들은 가도오도 못하고 경찰서 아페서 목을 느리고 잇다 한다.

 

<둑을 끊고 쇄도> (‘부산일보’ 1934년 3월 7일 자)

만원, 만원으로 연락선이 만원인 시대가 되자 철도성 부산영업소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이다. 구정을 고향에서 보낸 귀환 조선인의 내지 재도항자는 4, 5일 전부터 급증하여 매일 밤 부산 출항 연락선 1척으로는 어림도 없어 5일 밤에는 약 300명이 남겨졌고 화물편 창경환(昌慶丸)으로 일단 내지로 향했으나 이 상태는 양일간 계속될 것으로 보여 제1부두는 심각한 혼잡을 빚고 있다.

 

7 <염염한 화염 속에 항내 생매(生埋)된  四十四

복강현 길위탄항((福岡縣吉隈炭坑)의 참사 그중 조선인 三十五> (‘매일신보’ 1936년 1월 27일 자)

복강현 가수군 가천촌 길위탄항(福岡縣嘉穂郡桂川村吉隈炭坑)내 역원휴게소 동쪽 항(坑)으로부터 약 四十간 되는 부근에서 二十五일 오후 十一시경 화재를 이리키어, 당시 입항 중이든 항부 八十六명 중 四十二명은 화재로 항외에 피난하엿스나, 화재 현장에서 하항(下坑)중이든 四十四명은 화재의 열기로 통로가 차단되어 승항(昇坑) 불가능이 되엇는데, 전부가 생사불명이라는 바 그중에 조선인 광부 三十五이 석기어 잇다고 한다. 그 항에서는 즉시 화재개소을 밀폐(密閉)하고 작업을 하는 동시에, 깁히 들어간 四十四명에게 바람이 들어가도록 하야 그 구조에 전력을 경주하고 잇는 중인데, 二十六일 오전 九시까지에는 아즉 구조치 못하엿는 바, 원인은 방금 반총서(飯塚署)에서 뢰야(瀨野) 사법주임 이하 다수 경관이 현장에 급행하야 조사중이라고 한다. [<아소 요시쿠마 갱내 화재 사망자 29명, 부상자 2명, 대부분이 조선인 갱부임> (‘치쿠호석탄광업사 연표’ 385쪽)]

 

문자 그대로 조선인 피해자와 일본인 가해자가 기재된 기사도 있다.

 

8 <이역신고(異域辛苦)分々積金 귀향 도중에 분실

연락선 속에서 이러버리고 소동, 범인은 意外에도 船員> (‘매일신보’ 1936년 6월 18일 자)

본적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면 박선백(二二)은 수년 전 내지에 도항하야 복강현 반총탄항(福岡縣飯塚炭坑)의 탄항부로 로동하여 오든 터이라는데, 오랫동안 이역(異域)의 하날 밋헤서 그리든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야, 그 동안에 근검저축하여 모은 돈 五十여円을 가지고 十六일 아침 부산 입항의 부박(釜博) 련락선 제二 장보환(長寶丸)으로 래부하야 상륙하랴고 행장을 수습할 즈음에, 의외에도 회중에 너허두엇든 현금이 어느 자의게 절취당하고 업슴으로, 대경실색하야 상륙 즉시로 소관 수상파출소에 급보하야 왓섯다. 이에 동소에서는 즉시 범인 수사에 진력하야, 전기 장보환의 선부 수목경일(水木京一, 二六) 체포취조한 결과. 드디여 전기 범행을 자백하엿다는 바 여죄가 상당할 듯하야 방금 게속 취조 중이다.

 

Ⅱ 노무 동원의 시대

 

1939년에 정부는 국민 총동원계획을 수립하고 석탄, 광산, 토건 등 일본의 중요산업부문에 조선인 노동자 동원을 결정하였다. 전쟁 시기의 국가 의사에 따른 집단적, 계획적 동원이며 ‘자유 모집’에 의한 동원 시기(1939년 9월~1942년 1월), ‘정부 알선’에 의한 동원 시기(1942년 2월~1944년 8월), ‘국민징용령’에 의한 동원 시기(1944년 9월~종전)의 3단계를 거쳐 종전까지 66만 768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내지로 ‘이입’되었다(‘조선인 집단 이입상황조(朝鮮人集団移入状況調)’ 후생성 근로국, 1945년 9월). 이러한 시기의 언론에 나온 기사이다.

 

9 <북구주행(北九州行) 노동자 二十八 고흥서 다수 출발> (‘동아일보’ 1939년 11월 30일 자)

전남 고흥서도 노동자 다수를 모집하야 북구주 탄광으로 가기로 되어, 그곳에서는 인솔자가 인솔하고 지난 二十八일에 고향을 등지고 노동의 장소를 향하야 떠낫는데, 보내는자 가는 자의 송별로 일시는 시가가 잡답하엿다.

 

10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우량한 반도인을 채용함> (‘나가사키니치니치신문’ 1939년 12월 9일 자)

연료 국책 선에 따라 나가사키현 내의 탄광 방면은 노동자를 총동원하여 생산력 확충에 매진하고 있으나,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결핍으로 소기의 생산성적을 올리기에는 약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도가 각 탄광 종사자들의 공통 고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무자들 모여라!”라고 힘껏 외쳐도 이미 다른 곳에서도 잉여노동력이 없었고 탄광 방면의 노동자 부족은 언제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당국에서는 각종 대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결국 내선융화(内鮮融和)의 명분을 내세워 이참에 반도인을 내지에 대량 이입시키기로 하였다. 11월 하순부터 청년층을 죽죽 내지로 도항시키고 오늘까지 이미 1,500명에 도달하며 각각 나가사키 소개소의 알선을 통해 호쿠쇼탄전(北松炭田) 각 탄광을 비롯하여 세이히(西彼)의 사키토(崎戸), 하시마(端島), 다카시마(高島) 등 각 탄광으로 취직시키고 있어 탄광 반면의 노동자 부족도 차츰 완화되어 간신히 상태가 호전되었다.

 

11 <창영 노동자 다수  패도(貝島)광산 향발(向發)> (‘동아일보’ 1939년 12월 14일 자)

경남 창영군에서는 얼마 전에 농업 노동자 다수를 일철광부(日鐵鑛山)으로 알선하여 보내엇던바, 다시 지난 十一일에는 또다시 다수을 패도(貝島)광산으로 보내게 되어, 때마츰 급작히도 살을 에워내는 듯한 추위에, 그들 일행은 한 장소에서 군수, 서장(郡守署長)의 훈시를 차례로 받고, 二三十리 밖에서 멀리 전송차로 출발지까지 따라온 늙은 부모, 젊은 처자들의 눈물겨운 전송리에, 정든 농촌을 떨쳐버리고 수 대의 화물자동차에 몸을 실고 비창히도 떠나 버렷다고 한다.

 

12 <거창 노동자 다수 내지 광업지대 향발(向發)> (‘동아일보’ 1940년 2월 17일 자)

경남 거창에서는 북조선을 위시하야 만주와 일본으로 가는 노동자가 늘어가는 이때에, 또 근일에 일본 내지에서 직접 사람이 와서 노동자 다수를 모집하야, 지난 十三일부터 三일간에 분하야 각처 광업지대로 출발시킨다는데, 이 바람에 지정한 모사진업자와 이발업자의 경기는 풍성풍성하다는데, 농사질 사람이 부족될 것 같어 걱정이라고 한다.

 

조선인 갱부를 받아들이는 일본 측의 기사도 있다.

 

13 <고향의 처자식에게 송금. 아름다운 반도인의 마음가짐> (“홋카이타임즈’ 1939년 11월 25일 자)

반도 인은 참 귀여운 것 같다. 반도인이 탄광에 들어와 좋든 나쁘든 탄광에 활기가 생겼다. 반도인이 교활하다고 말하는 자는 선입관이 있어서이고 2, 3건 물의는 발생했으나 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지금은 얌전히 다들 잘 일하고 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반도인 일대가 국방 복에 배낭을 메고 몸단장을 해  갱구에 서두르게  들어가는 씩씩한 모습을 보면꽤 늠름한 산업전사 같다.

가미스나가와(上砂川)의 합숙소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제2奥■친화(奥■親和) 합숙소이다. 기자가 방문하자 다들 갱내에 들어갔고 취사 당번 몇 명이 물을 끓이고, 무를 절이고 있었다. 고추와 마늘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는 이들이라 탄광에서는 이를 사모으느라 고생이다. 도시락 찬으로 굵고 빨간 고추를 2개씩 넣는데 통째로 씹어먹는다. 절인 무는 고춧가루로 빨갛게 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

그런데 마늘에 대해 갱내에서 냄새 때문에 같이 일하기 싫다는 내지인 갱부의 항의가 회사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이를 전하자, 대표자가 “저희도 일본국민입니다. 앞으로 일본 내지인들과 함께 일해야 하니 마늘을 딱 끊겠습니다”라고 맹세하여 다부진 모습을 보였다.

 

한편, 조선인 갱부들의 입갱 거부와 파업을 전하는 뉴스도 있다.

 

14 <애초와 이야기가 다름, 입갱을 피함> (‘아사히카와신문’ 1939년 11월 1일 자)

 본도 탄광 노무자의 인적자원 충족에 한몫한 반도인이 10월 초순부터 소라치(空知)의 각 탄광에 차례로 입산하여 그 취업성적이 탄광 당국은 물론 도청 직업과 및 각 직업소개소로부터 주목을 받은 가운데, 이달 중순부터 미쓰비시 비바이(三菱美唄)광업소에 입산한 약 300명은 그 이후 수직굴광무소 취급 하에 1번, 2번으로 나뉘어 입갱하여 일하던 중인31일 오전 6시 갑자기 1번 입갱 150명이 입갱을 피하고 오전 중 입갱하지 않자 이에 당황한 회사 측은 가능한 한 입갱시키고자 1번 책임자와 협의 중이다. 원인은 약속된 임금 지불을 거부해서라는데, 2번 입갱 자 150명도 같이 나올 것으로 보여 일반 직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15 <이민(移民)들 귀향희망, 면당국에 호소장을 보내> (‘동아일보’ 1939년 12월 10일 자)

[하동]지난 十월경에 하동지방에서는 군경 알선으로 노동민 다수가 복도현(福島縣) 반성탄광주식회사(盤城炭鑛株式會社)로 행하야 출발하엿던 바, 미구에 탈주하는 분도 잇엇다 하며, 금번 특히 악양면(岳陽面) 당국으로 악양반원 二十여명 일동이, 모집 당시 규정과 현재의 노동시간, 임금, 대우 문제, 기타 여러가지 점으로, 다대한 상위가 잇음은 물론이오 도저히 인내할 수 없으니, 귀향케 하여 달라고 눈물의 하소장이 래도하엿다 한다.

 

그러나 노무 동원의 시기는 ‘내지 밀항’의 시기이기도 했다.

 

16 <누증(累増)되는 밀항 뿌로커> (‘동아일보’ 1940년 1월 13일 자)

이제 부산부두를 중심하야 활약하고 잇는 이들 밀항 뿌로커들의 간게백태의 열락관게를 들어내자면, 밀항 뿌로커 중에는 본판 뿌로커와 직속 뿌로커와 또한 지방 뿌로커의 三종이 잇어서, 지방 뿌로커는 지방에서 농민들을 꾀어서 부산까지 교묘하게 다리고 오는 편이며, 직속 뿌로커들은 그들이 모집해 온 무리들을 그들 세포 뿌로커들의 장막에서 모여서 한 항로(航路)의 무리가 되도록 주서 모이는 편이며, 본판 뿌로커는 직속 뿌로커가 어느 곳에 밀항자가 얼마 잇나 하면, 밀항선 준비를 하여 밀항키로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들 밀항군들에게 받은 밀항비 二十円 내지 三十円의 분배 내용을 실피여 보건데, 지방 뿌로커야 밀항자에게 얼마를 받든 불고하고 직속 뿌로커에서 넘길 때 한사람에게 十五円식 흥정하여 넘기며, 이 직속 뿌로커는 본편 뿌로커에게 八円식 넘기는 것이 최근 부산의 시까다. 그러므로 부산지방 사람 중에서 혹 밀항을 하면 지방 뿌로커의 손을 거치지 안터래도 되는 더이므로, 十五円이 직속 뿌로커의 손에 들게 되는것이다. 만일 밀항선을 탈 장소를 알게 된다면 직속 뿌로커의 손을 거치지 안트래도, 그 장소에 그들과 같이 숨어 잇다가 배탈 때 본판 뿌로커에게 八円만 지불하면 밀항이 되도록 되여 잇으나, 그들의 잠복지대를 알어내기가 어려운 일이라 좀체 직속 뿌로커의 손을 넘지 안코는 용이한 일이 아닌 어마어마한 경게가 잇는거이라 하다.

 

17 <밀항뿌르커 체포> (‘동아일보’ 1940년 1월 30일 자)

본적을 경북 김천군 감문면(慶北金泉郡甘文面) 구야동(九野洞)에 두고, 복강현 달하군 행월정(福岡縣遠賀郡香月町)에서 고물상을 하고 잇는 이태우(李台雨, 三九)는, 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인근 동리에 돌아다니며, 일본 내지에 가고저 하나 도항 증명을 얻지 못하야 가지 못하고 잇는 촌민들에게, 자기가 도항을 시켜준다고 꼬여서, 한사람에게 九円 이상 몃十円식 현금을 사취한 것이 발각되여, 범인은 김천경서에 유치 취조중이라는데, 피해자는 전주혁(全柱赫) 외 수 명으로 피해액이 상당한 모양이다.

 

18 <밀항뿌로커 五百 명 의연각지(依然各地)서 준동(蠢動)> (‘동아일보’ 1940년 3월 10일 자)

밀항 사건은 부산의 특수범죄를 형성하야 사회의 여론이 비등하고 잇는데, 전기 밀항뿌로커들은 부산三서(署)에 등록된 자만 실로 五百여 명으로써, 그들이 지어낸 범죄가 작년 一年 동안 五百여  건의 검거로써 그 인원이 五萬여 명이라 하며, 피해 전액이 실로 二十萬만円을 돌파한다는 것이다.

 

19 <밀항뿌르커 체포 목포서(木浦署)에서 엄조중(厳調中)> (‘동아일보’ 1940년 5월 19일 자)

전남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내지 도항 푸로카가 목포서원(木浦署員)에게 발각되여 체포하엿다는데, 대개 말한 바에 의하면 자는 인쇄소에 인쇄물을 부탁하여 공문(公文)을 인쇄하여, 공인(公印)은 내지 도항 증명서(渡航證明書)를 발행하야 피해자 수백명을 내엿다는데, 피해액은 약 三千円 정도라 하며 공범도 없지 안한 모양인데(생략).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이후 폐간]

 

일본으로 나가 돈벌이하도록 유인하는 듯한 기사도 있다.

 

20 <조선인 광부에게 특별 우대설비> (‘오사카아사히・중선판(中鮮版)’ 1940년 4월 21일 자)

후쿠오카현 온가군 미즈마키초(福岡縣遠賀郡水巻町) 닛산(日産)광업소에서는 석탄 증산의 방법으로 조선인 광부를 채용하여 그들을 위한 특별 사택, 아파트 등을 신축하여 우대하고, 특히 남선 한해지에서 온, 순박한 타지에서 돈벌이하는 자들을 위한 제1, 제2 상경합숙소는 입소자들이 마치 여행지의 여관에 묵듯이 쾌적하다 하며 빈틈없는 설비들에 아주 감격하고 있다. 봄의 조용한 저녁 시간에 하루의 갱내 작업을 마친 동료 광부들은 고향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한 큰 욕탕에 넘치는 온탕에 몸을 담그면서 현해탄을 바라보며 멀리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21 <조선인 광부의 엄청난 벌이> (‘오사카아사히 남선판(南鮮版)’ 1940년 5월 8일 자)

조선인 광부들은 열심히 번다, 한눈도 팔지 않고 일한다. 와카마쓰시(若松市) 밖의 미즈마키초(水巻町) 닛산 온가 제2 다카마쓰탄광(日産遠賀第二高松炭鉱)에서 지난 3월부터 일하는 조선인 광부 약 400명은 동 광업소의 삼두 훈련 소(山頭訓練所)에 수용되어 매일매일 각자의 자리를 완벽히 지키며 채탄 보국을 위한 피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400명이 3, 4월에 고향에 송금한 총액은 실히 1만 7천 엔, 이달 말까지는 2만 5천 엔을 돌파할 전망이라고 하니 대단하다. 게다가 이 외에도 우체국예금이 현재 1만 2~3천 엔 있으며 회사에 낸 의무저금이 5천 엔을 한참 넘었다고 하니 근검 역행의 모습은 내지인 광부들의 모범이 되고도 남으며 향후 석탄 증산에 그들이 맡은 역할이 중대할 것이다.

 

민족신문에 총독부 관계자의 발언이 소개된 적도 있다.

 

22 <내지재주(内地在住) 반도인 소질 점차 향상, 일야경기사회과장담(日野京畿社會課長談)> (‘동아일보’ 1940년 4월 5일 자)

후생성 중앙협화회(厚生省中央協和会)에서는 거(去) 十三일부터 남부조선칠도 고등경찰 관계자 및 사회과 관계자 十七명을 초대하고 내지 각지의 반도인의 생활 상태를 시찰시켯는데, 일행은 예정대로 시찰을 하고 거 三十一일 각각 귀임하엿다. 단장으로는 출석한 일야(日野)경기도사회과장은 말한다.

현재 내지에 잇는 반도인은 九十만 인으로서, 十年前 소화(昭和)六년에 三十一萬에 비하면 삼배위(三倍位) 증가하엇다. 그러고 우(右)九十萬인 중 국어를 해득(解得)하는 자가 四十만 명이고, 해득치 못하는 자가 五十萬명에 달하야 생활상 다대한 불편을 감(感)하고 잇으므로, 무엇보다도 국어를 보급시키는 것이 끽긴(喫緊)한 문제다.

정신 지도에 잇어는 다년(多年) 노력한 결과, 十年前에는 百명에 대하야 범죄건수가 十一명이엇는데, 금일에는 四명의 비율로 감소되어 결국 도항자는 증가하엿으나, 범죄가 축일(逐日) 감소되고 잇음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내지 각공장에서는 반도인 노동자를 대환영하고 잇는데, 이들 노동자를 지도할 중견 청년이 적기 때문에, 조선 내에서 우(右)지도자를 양성할 기관을 설치하려고 생각한다. 이미 내지 신내천현(神奈川縣)에서는 반도인 노동자 수련도장을 설(設)하야 지도하고 잇는데 다대한 효과를 거(挙)하고 잇다.

또 애국의 열성이 앙양(昻揚)되어, 사변후 二十五萬이라는 거액을 헌금하고 잇어 각 소에서 미담이 속출하는 모양이다. 다음 창씨 문제에 대하여서는 다대한 관심을 하고 잇는 모양인데, 그 수속이 복잡하야 일부러 조선까지 귀래하지 안흐면 안될 모양이어서, 그 수속에 간편한 방법을 강구하지 안흐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시마의 조선인 갱부가 고향에 한해(旱害) 구제금을 보냈다는 기사이다.

 

23 <내지간 노동자가 한해구제금(旱害救済金)을 보내> (‘동아일보’ 1940년 6월 19일 자)

【진주】작년 十二월말경 장기현 삼능고도광업소 단도탄항(長崎縣三菱高島鉱業所端島炭坑)에 인부로서 모집되어간 진주출생 일동으로부터, 한해구제사업비에 보조하여 달나고 지난 十七 진주부청에 금五十円 왓다는 바, 은을 받아가 갖이 근검저축하야 보낸 것이라고, 그 열성에 일반은 감격을 마지 안는다고한다.

 

하시마 탄광 르포 기사도 있다.

 

24 <생각지도 못한 탄갱 지옥와보니 놀라운 과학의 정수> (‘나가사키니치니치신문’ 1941년 2월 28일  자)

석탄 증산의 정신대로서 가래를 곡괭이로 바꿔 햇빛도 닿지 않는 깊은 지하에 들어가 묵묵히 국책에 협력하고 있는 농한기 근로봉사대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자가 하루 하시마를 방문했다. --동중국해의 파도가 치는 나가사키항 밖에 꿈처럼 떠있는 군함을 닮은 검은 다이아몬드섬, 정확히 말하면 니시소노기군 다카시마촌(西彼杵郡高島村)의 하시마이다. 면적은 매우 작지만 인구 밀도는 도쿄 후카가와(東京・深川)의 4배이며 실로 세계 1등.  게다가 이 섬 전부가 세계과학의 정수로 이루어져 있기에 놀랍다… 나가사키 오하토에서 배를 타고 약 1시간 반, 겨우 도착하여 바로 놀란 것이 멋진 철근 콘크리트 건물. 대부분이 4, 5층 정도의 규모이고 지상 9층의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우뚝 서있다.

긴 터널의 보도를 지나 섬 중앙에 있는 하시마 신사에서 참배 후 잠시 쉬고 효고(兵庫) 갱장의 안내로 발랄한 옷차림으로 채탄 현장으로 갔다. 수갱(竪坑) 2천 척, 50명 탑승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기고 땅속으로…  초속 40척의 속도로 하강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만들어서 그런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단, 중간에 귀 상태가 이상해진 것이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도착한 2천 척 깊이의 땅속, 약간 습하기는 하나 대낮처럼 불이 들어오고 유선형의 전차가 몇 십대씩 탄차를 끌며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린다. “머리 위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어요.”라는 갱장의 말을 듣고 문뜩 지하 2천 척 깊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 갱도를 신기하게 구경하다 채탄현장에 도착했다. 탄갱이라 하면 곡괭이를 떠올릴 터이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인 듯 ‘빅’이라고 불리는 전기 채탄기로 열심히 캐고 있다. 언뜻 쉬워 보이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채탄해야 하므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굴진 부의 일이다. 이 외에 탄차에 석탄을 나르는 자, 채탄 후에 충전하는 자, 갱도를 만드는 자, 탄차를 옮기는 자, 이렇게 보니 탄갱노무자의 고생을 알 것 같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시커먼 몸으로 묵묵히 주어진 일에 정진하고 있다.

엄청난 다이너모의 울림, 이는 지하수를 없애는 동력의 소리이다. 2천 척 깊이의 땅굴 속에 있어도 호흡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당연히 날법한 가스 냄새도 하나 안 나는 이유는 이상적인 통풍기를 이용하여 지상의 신선한 공기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에 과학의 힘을 이용하고 있기에 갱내에서 위험을 느낄 일이 전혀 없다. 탄갱에 투입된 새내기 근로봉사대원도 물론 기쁘게 일하고 있다. 전체적인 갱내 안내를 마치자 효고갱장은 “전체적으로 안내를 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탄갱노무자의 일에 대해 이해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지옥도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무자들의 얼굴은 사회인들이 탄갱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노무자들의 생활도 바뀌어 최근에는 예전처럼 야만적인 일은 찾아보려고 해도 못 찾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물론 이는 오락 시설의 완비와 처우 개선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나, 가장 큰 원인은 사변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12월 대정 익찬 운동에 호응하여 노무자들의 신도실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하부조직의 취지에 따라 자치적으로 훈련과 인격 수양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태업, 무단조퇴, 전직 등을 하는 자가 줄어 큰 효과를 거두었다. 아마 근무성적은 일본에서 1등일 듯싶다”라고 말했다. (이하 생략)

 

다음 르포기사에 나오는 사쿠라이 긴사쿠(桜井金作)의 발언도 흥미진진하다. 하시마에 오래 근무한 히로시마현 출신 남성이다.

 

25 <농한기 근로봉사대 르포기사> (‘나가사키니치니치신문’ 1941년 2월 28일 자)

“탄광 노무자로 일한 지 벌써 31년. 처음에는 다카시마에서 일했는데 당시에는 임금도 싸서 48전에서 많아야 90전 정도로, 설비 등도 전혀 안 되어 있고 멜대로 석탄을 매고 옮겼습니다. 어깨는 아프고 한때는 일을 잘 못 한다고 동료한테 맞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울면서 지냈습니다. 이러한 제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시마누케(島抜け, 몰래 섬에서 도망치는 것)’이라고 해서 감시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술통을 몸에 달고 헤엄쳐서 도망쳐갔습니다. 그 후에 하시마로 옮겨 벌써 18년이 됐는데 당시의 하시마도 아직 옥방 같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일이 매일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같은 하시마가 된 것은 20년 전쯤부터 회사가 오락 시설에 힘을 쏟기 시작한 이후입니다…… 대부분의 노무자는 세상을 등진 자들이 많아서 따뜻한 마음으로 지도하면 사랑에 굶주린 만큼 보통 사람보다 빨리 마음을 열게 됩니다. 저는 이 밖에 노무자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중매를 서주고 있는데 섬에는 여자가 적어서 생각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국가 총력을 전쟁 수행에 집결하게 되었고 조선의 신문에도 시국에 협찬적인 기사가 늘었다. 먼저 조선인 갱부의 내지 방문을 전하는 기사를 보겠다.

 

26 <우량 광산 종업원 선발내지에 파견> (‘매일신보’ 1942년 2월 1일 자)

강원도 광산연맹에서는 지난번 광산增産 강조 기간 중 성적이 우량하다 하야, 표창을 밧게 된 광산 종업원 중 左記 十명을 선발하야, 내지의 우량 광산인 복강현 삼지탄광(福岡縣三池炭鑛)에 파견하야, 約一週日 동안 決戰체제하 광업戰士로서 광업 보국의 실정을 상세 견학시킴과 동시에, 근로 봉사를 하게 하며, 계속하야 각 광종(鑛種) 별의 우량 광산(조생(鯛生), 생야(生野), 족미(足尾)) 등을 一日 내지 二日間씩 견학시키기로 되엿다. 그런 다음 이세대묘(伊勢大廟), 도산어릉(桃山御陵), 궁성(宮城), 명치신궁(明治神宮), 정국신사(靖國神社) 등 각 聖地를 참배시키어, 日本意識의 앙양(昂揚)과 道內 광물 자원의 增産 확보에 이바지하기로 되엇는데, 일행은 二월 하순에 춘천을 떠나 三월 중순까지 二十一일 동안 시찰을 마치고 귀임할 터이라한다. 그리고 一人당 소요 경비는 百五十円인바 도광산 연맹에서 百円을 보조하기로 되엇스며, 기타 광산에 대하여는 자비 가입의 희망자에 대하야 참가시키기로 되엇다 한다. 우량 종업원으로서 선발 파견하기로 된 시찰 단원은 다음과 갓다(생략).

 

27 <동생의 순직에도 슬퍼하지 않고 반도인이 일에 매진한 기록> (‘나가사키일보’ 1943년 7월 23일 자)

기타마쓰우라군 고사자초(北松浦郡小佐々町) 일본광업 주식회사 야타케탄광(日本鉱業株式会社矢岳炭坑) 공원 가네모토 미츠카와(金本光川, 27)는 반도 출신 채탄 전사인데 지난 7월 2일, 동생인 노무 담당 가네모토 니치슈(金本日洙)가 순직하여 유골을 고향에 매장하고 오라는 회사 측의 권고를 단혼히  거절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직역봉공(職域奉公)에 정진하고 땅속 석탄을 캐느라 노력을 계속하고, 그 감투에 자극을 받은 반도 동포들은 직무봉사의 정신이 투철하여 결전 상황에서 석탄 증산에 박차를 가하여 전력 증강 및 직역 봉공의 미담이 되었기에 아이노우라서(相浦署)에서는 이 행위를 공원의 모범으로써 조만간 시상하기로 하였다.

 

28 <혈서로 지원한 반도 청년의 충성> (‘나가사키일보’ 1943년 9월 28일 자)

‘천황폐하의 적자가 되어, 일본 정신’……이렇게 혈서로 해군 특별지원을 원한 반도 청년이 사키토(崎戸)탄광에서 현특고(特高)과로 왔다. 이는 조선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계포동 출생, 니시소노기군 사기토초(西彼杵郡崎戸町) 사키토탄광 제1친화 합숙소 동 청년학교 2학년인 가나가타케 다이진 (金岳泰鎮, 17) 군이다. 가나가타케군은 작년 3월 증탄전사로서 사키토를 방문하여 그 이후  군인이 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반도인에게 육군 징병제 실시 및 해병특별지원제도 제정이 발표되자 일본국민으로서 하루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8월에 해군특별지원을 청년학교에 지원했으나 각종 사정 때문에 포기하라고 설득한 결과 일단은 돌아갔으나, 계속된 솔로몬 방면의 결전을 보고 이대로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여 9월 18일 만주사변기념일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절단하고 ‘천황폐하의 적자가 되어 일본 정신’이라고 반도청년의 열혈을 혈서로 쓰고 지원서를 첨부하여 다시 청년학교에 지원을 하였다. 이 진심에 감격한 학교가 이를 당국에 보고하고 지원 절차를 밟기로 하였다.

 

29 <끝까지 일하겠습니다> (‘매일신보’ 1944년 5월 5일 자)

“오직 한결같이 석탄 증산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탄광에 평생을 바칠 각오를 굳히고 열심히 일하는 반도의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는 가호탄전(嘉穂炭田)에서 일하는 가나가와(金川龍甲) 군인데 가나가와 군은 예정된 기간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갈 차례가 되었으나 “아니, 저는 끝까지 일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그대로 탄광에 남아 예전과 똑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가나가와 군은 탄광에서 가장 성적이 좋고 임금은 언제나 최고를 차지하고 동안 고향에 보낸 돈은 一千円이며 저금은 八百円 달했습니다. (원문은 일본어).

 

30 <기생 위문대(妓生慰問隊) 용약(勇躍) 내지向發>(‘매일신보’ 1945년 1월 20일 자)

내지에서 일하는 반도출신 산업전사들에게 향토의 노래와 춤을 보내여 내일의 전력증강의 힘이 되게 하고저 총력연맹에서는 근로동원 원호회, 석탄통제회, 일본이동극단연맹 등과 공동주최로 오는 二十일부터 二월 二十일까지 한 달 동안에 걸처 기생부대 二十여 명을 三반으로 나누어 구주(九州)에 두 반을 북해도(北海道)에 한 반을 위문파견하기로 되엇는데 일행은 총력연맹 주사쓰지(辻喜作) 씨에 인솔되어 十八일 오후 六시 三十분 경성역발 열차로 장도에 올랏다. 그런데 일행의 씨명은 다음과 갓다(생략).

 

이상, 노무 동원 시기의 공적 담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인 노동자의 산업계에 대한 공헌이 점차 강화되는 과정에 호응/협력하는 조선인의 모습과 가끔 발생하는 저항의 모습이다. 후쿠시마현 이와키 탄광회사와 소라치 탄광의 기사가 저항의 사례인데, 그러나 앞의 기사는 모집조건과 임금 간에 차이가 없음이 밝혀지고 회사 측에 노동자 대우에 유의해야 한다는 경고가 내려졌고, 소라치 탄광의 건은 ‘관할서 설명을 통해 오해임을 인정하고 해결함’이라고 내무성 경보국이 발간한 ‘특고(特高)월보’(1939년 1월호)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노무 동원 시대에도 ‘내지 밀항’이 활발했음을 고려하면, 1과 2에서 말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희생자성’과 ‘사악한 나라 일본’의 표상은 전후에 한일이 협동해서 만들어낸 새로운 신화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일은 이 시대의 조선인에게 일본에 대한 적의와 증오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에서는 그러한 조선인 측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알기 위해 이 시대의 정치적 일탈자와 저항자를 주요한 등장인물로 삼은 ‘특고월보’ 기사를 살펴보겠다.

 

특고월보의 기술

 

노무 동원 실시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간행된 ‘특고월보’(1939년 11, 12월)에 따르면 12월말  시점에 내지로 이주한 조선 노동자 수는 1만 9135명, 이 중 67% 정도가 홋카이도와 후쿠오카현으로 이송되었다. ‘노무 동원 계획시행에 따른 이주조선인 노동자 상황’이라는 제목의 항의 ‘개설’ 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31 ‘특고월보(1939년 11, 12월)

그런데 이들 조선인 노동자 가동상황은 대체로 양호하고 각 업체로부터 미래를 촉망받고 있으나, 일부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자도 섞여 있어, 이들 분자는 다른 일반 선량한 자를 부추겨 분쟁을 야기시키고 있다. 또한 지원을 내지도항의 수단으로 삼는 자도 있다. 이들은 갱내 작업에 공포를 느끼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주기도 하여 현재 판명된 도주자는 429명이나 된다. 게다가 이주조선인 중에는 다른 이의 대리로 온 자가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자는 121명이 되었는데, 발각되지 않은 자도 상당히 있을 것으로 보여 이러한 상황은 불령분자의 내지 잠입에 최적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앞으로 주의경계가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또한, 모집을 통해 이주한 조선인은 불평불만 등이 있으면 항상 집단행동에 나서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사업주와 내지인에 대해 이러한 경향이 현저하다. 업체의 이러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양호하고 성의를 갖고 대처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 아무튼 조선인 노동자는 거만해지는 경향이 보이므로 점차 이러한 점에 대해 앞으로 단속하거나 지도하여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집에 따른 조선인 노동자에게 치안상 또는 협화 사업 수행상 중대한 지장을 주고 내지인 및 주재 조선인에게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자, 즉 도래 후 도주하다가 거처가 발각된 자, 또는 각종 분쟁의 주모자로서 죄질이 심각한 자 등은 병환으로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자와 함께 그 이유를 설명하고 본적지에 송환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장을 보면, 조선인 노동자의 동원에는 처음부터 난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업 전사’ 처럼 불려도 조선인에게 전쟁이란 어느 정도는 남의 일인 전쟁이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충성심도 일본인과는 달랐을 것이다. 민족의식과 이문화 갈등도 틀림없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고월보’는 관헌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데 이 시대의 조선인 갱부와 일본인, 일본기업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예로 31의 ‘대리’에 대한 기술을 ‘월보’에서 살펴보면, 수송 시 인솔자가 ①조선어를 못 하는 사람이 많고 ②평소 조선인을 접할 경험이 적어 인물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고 ③인솔자에 비교해 피 인솔자 수가 많아 전체에 대한 주의가 부족했던 것 외에도 가명자가 교묘하게 피가명자의 본적, 주소, 이름, 나이 기타를 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명의 동기는 무엇일까. 조선인에게 평소 내지도항을 ‘열망’하는 자가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고, 그들 중 이번 모집에 지원하지 못하는 자가 ‘이름을 사칭’하여 모집자들 속에 섞여 들어가 내지에 도항한 것인데, 그 방법은 ①모집을 포기한 자의 호적등본을 받아 도래하는 예, ②인원 점호 시 나타나지 않은 피 모집자 대신 답하여 도래하는 예, ③출발을 배웅하는 정차장이나 승선지에서 생각이 바뀐 피 모집자의 호적등본을 받아 도래하는 예 등 3가지 형태가 있다고 한다.

‘밀항 브로커’ 의 항에서 보았듯이 노무 동원시대는 ‘내지 밀항’의 시대이기도 하고, 노무 동원 이전에도 밀항자는 많았다. 노무 동원이 시작되기 전해인 1938년 시점에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수는 79만9878명이었으며, 그 수는 같은 해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63만 3320명을 웃돌았다. 이 시기에 특히 조선 남부에 사는 청년들에게 있어 ‘내지’란 기회의 땅이자 많은 조선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내지로의 도항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대리’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온 자가 있어도, ‘도망자’가 있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애초부터 ‘도주’하려고 모집에 응한 자가 있었음은 도주 원인이 기록된 항목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다. (1)처음부터 내지도항의 수단으로 지원해온 자, (2)응모 후 내지 주재의 지인이나 다른 이에게 도항 후에 도주해서 오라는 통신을 받은 자, (3)취업지로 가는 도중에 타인에게 탄갱광산 작업은 위험하니 다른 유리한 직업을 알선해주겠다고 유혹당한 자, (4)탄갱광산 등의 작업에 공포를 느낀 자. (5)탄갱광산 등 작업의 과로함을 혐오한 자, (6)모집 시의 노동조건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 자 등 6개의 유형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도주자 수는 노무 동원 초기의 이 시점에서는 429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관 알선, 징용기 시기에 많이 증가한다. ‘특고월보’에 따르면, 1943년 12월 기준으로 ‘모집’을 통한 이입자 14만 6938명 중 5만 8598명이 도주하고 ‘관 알선’에 의한 21만 9526명 중 6만137명이 도주했다고 한다. 기회를 포착하는데 매우 재빠른 조선인과 근면하지만, 어딘가 틀에 박힌 일본인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 ‘특고월보’(1939년 11, 12월)에는 ‘이입 조선인 노무자’ 관련 ‘분쟁의(紛争議) 명세표’가 있어 내지 이주 조선인 노동자가 현장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파업’ ‘임금인상 기타에 의한 분쟁’ ’내지인과의 투쟁’ ‘내지인의 폭행에 의한 분쟁’ ‘태업’ 등 ‘분쟁의’에는 몇 가지 분류가 있고 31건의 사례가 있으며 그중 26건이 홋카이도에 편중된 점이 난점이기는 하나, 이곳에 기재된 짧은 리포트는 이 시대에 조선인 갱부와 일본인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문화마찰과 관련된 것과 분쟁 경위가 비교적 명료하게 기재된 것을 먼저 15건을 소개한다. 1939년 10월부터 12월에 걸친 사례이다(문화마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는 밑줄을 그었다).

 

32 삿포로군(札幌郡)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데이네 광산(手稲鉱山)(참가자 조선인 전원 293명)

10월 21일 조식 중, 양갑석이라는 자가 미소시루가 싱겁다고 이를 돼지 먹이라고 하며 사감 요네자와 요시오(米沢義雄)에게 항의함. 말다툼 끝에 같은 자리에 있던 약 20명의 조선인이 결속하여 요네자와 사감에게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며 점차 전체 노동자에게 파급될 뻔했으나 회사 측의 만류로 일단은 진정하고 돌아갔는데, 다음 날 22일에 일제 파업에 나서 그중 약 100명은 삿포로 경찰과 도청을 방문하고 여비를 받고 내지 공장으로 전출 또는 귀국하겠다고 말하고 짐을 싸서 하산을 시작했으나 경찰관이 저지하여 현장으로 복귀하였다(관할서의 알선을 통해 회사 측은 7개 요구항목 중 일부를 받아들이고 해결함).

 

33 삿포로군(札幌郡)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데이네 광산(手稲鉱山) (참가자 조선인 전원 292명)

11월 7일 낙반으로 인해 이성만이 부상하고 사망한 것을 계기로 1. 시신은 그대로 본적지로 송환할 것, 2.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는 유족이 도착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을 것, 3. 시신은 매장할 것, 4. 장례 집행 시까지 모두 휴업할 것을 요구함.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 관할서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타이른 결과 일단 진정하고 돌아갔으나, 다음 날 8일에 장례를 집행하고 화장터에 대표자 30명이 참석할 것을 회사 측이 전하자 여럿이 폭언을 내뱉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함(관할서원 제지를 통해 진정시키고 주모자 8명을 검거하고 그중 2명을 송환함).

 

34 아사노 탄광(浅野炭鉱)(참가자 조선인 전원 48명)

11월 8일 “간장이 부족하고 밥이 식었다, 근무시간이 길다, 임금이 싸다" 등 개선을 요구하며 입갱 거부(관할서원 설득을 통해 해결).

 

35 스미토모 광산(住友鉱山) 우타시나이 탄광(歌志内炭鉱)(참가자 조선인 148명 중 8명)

모집 조선인 노동자 148명 중에서 8명을 선발하여 반장으로 통제를 시키고 있으나 11월 8일 반장 김유식이 반장을 대표하여 “반장을 사원으로 대우하여 갱 밖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여 회사 측의 설득에 응하지 않고 입갱을 거부함(관할서원 설득으로 해결).

 

36 소라치군(空知郡) 미쓰비시(三菱) 비바이 탄광(美唄炭鉱)(참가자 조선인 전원 30명)

11월 11일 갱내에서 내지인 지도원이 김만준을 지도하는 데 있어 이 자의 동작이 느림을 호통치자 말싸움과 몸싸움으로 이어졌고 내지인 노동자가 거들어 김만준은 휴양 2일을 필요로 하는 타박상을 입었음. 이에 약 30명의 조선인이 해당 내지인을 응징하라고 책동하였다(주재 순사가 해산시킴).

 

37 소라치군(空知郡) 만지 탄광(万字炭鉱)(참가자 조선인 전원 68명)

급여에서 건강보험 등 공제금이 있음에 불복하여 일급 3엔으로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단행함(관할서원 설득으로 해결).

 

38 유바리군(夕張郡) 유바리 탄광(夕張炭鉱)(참가자 조선인 전원 238명)

검춘순이 염장 생선 한 조각을 몰래 훔치는 모습을 취사부가 발견하여 구타 후 기숙사장 가토 기요시(加藤清)에게 넘긴 결과 기숙사장이 다시 3, 4차례 검춘순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한 조선인 노동자 238명이 기숙사장의 경질을 요구하며 입갱을 거부함(관할소장이 진정시킴).

 

39 유바리군(夕張郡) 유바리 탄광(夕張炭鉱) (참가자 조선인 전원 28명)

갱내 작업원 조선인 김정남 외 2명은 내지인 안도 요지로(安藤与次郎)에게 질책당하여 싸웠는데 이를 들은 조선인 28명이 모두 모여 안도를 구타하려고 했으나 안도가 교묘하게 다른 곳으로 대피함. 그래서 조선인 측은 사건 해결 시까지 작업을 중지하겠다며 무단으로 출갱하여 갱구에서 회사담당자와 충돌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임(관할서의 설득으로 해결. 안도는 상해죄로 검거).

 

40 홋카이도 탄광 기선 주식회사 호로나이(幌内)광업소 만지 탄광(万字炭鉱) (참가자 조선인 108명 중 47명)

이주 조선인 노동자 김교영 외 3인은 갱내 작업 중 전복되었으나 복구 방법을 내지인 노동자로부터 지도를 받는 데 있어 언어가 불통하여 오해가 생겨 이를 불친절하다고 분개하여 출갱하고 다른 동료에게 “지금 갱내에서 내지인이 막대기로 때려고 했고 전등을 빼앗겨 매우 위험해서 뛰쳐나왔다. 갱내 작업은 위험해서 할 수 없다”라고 과장하여 소문을 내 갱내 가동거부를 선동한 결과, 모두가 동요하여 입갱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관할서의 설득으로 해결).

 

41 몬베쓰군(紋別郡) 스미토모(住友) 북일본광업소 고노마이 광산(鴻之舞鉱山)(참가자 조선인 전원 280명)

10월 7일 갱내 작업 중, 조선인 노동자 맹형섭과 내지인 고다마 마사오(児玉正雄)가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벌이다 고다마가 철봉으로 맹을 구타해 상해를 입혀, 이곳에서 가동 중인 조선인 45명이 맹에게 가세하여 고다마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했으나 내지인의 중개로 고다마는 대피함.

그러나 다음 날 6일이 되자 조선인 140명이 일제히 파업할 기세로 시위하고, 1. 이불 파손을 무상으로 12월 중에 수리해달라, 2. 음식을 개선해달라, 3. 방해설비를 마련해달라, 4. 열탕을 오후 4시까지 준비하고 두 곳으로 증설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다른 조선인 노동자 140명을 유인하여 280명이 결속, 회사에 와서 이와 같은 요구를 강요함(고다마를 상해죄로 조치. 조선인 주모자 12명을 엄중히 타이름. 관할서 알선으로 회사에 요구사항을 수용하게 함).

 

42 요이치군(余市郡) 다나카(田中)광업주식회사 도도로키 광산(轟鉱山)(참가자 조선인 전원 30명)

12월 4일 적설 피해로 인해 조선인 갑만우가 변사하자 조선인 노동자 30명이 결속하여 “조선에서는 변사인이 생기면 그 집을 소각하여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풍습이 있으니 기숙사를 변경해달라, 같은 이유로 직장을 변경해달라”고 요구하여 태업을 시작하였음(관할서 알선으로 회사 측이 양보함).

 

43 소라치군(空知郡) 만지 탄광(万字炭鉱) 미루토 탄광(美流渡炭鉱)(참가자 조선인 전원 68명)

12월 1일 갱내 가스폭발 재해사고가 발생하여 동료 4인이 사망하자 김미암 외 3인은 갱내 작업이 위험하다고 과장된 소문을 내어 파업을 선동하고 다른 곳으로 전출 내지는 휴업을 요구하는 등의 불온한 정세를 조장함.

변사체 유골을 인수하러 온 유족 중 정연■외 3인은 회사에 대해 “회사가 위험한 곳에 들어가 일을 시켜 사망하게 했으니 회사에 책임이 있다. 몇백 배 부조를 준다 해도 유골을 인수 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는 규칙의 10배 또는 20배를 준다면 인수 하겠다”라고 하는 등 위협적인 태도를 보임(관할서 설득을 통해 해결. 정은 협박죄로 심문하고 조치함).

 

44 유바리군(夕張郡) 유바리(夕張)광업소 평화광산 협화 합숙소(協和寮)(참가자 조선인 전원 256명)

조선인 노동자의 숙소인 협화 합숙소에서 전라북도 출신 김석종은 경상남도 출신 김덕룡과 싸워 동 숙소에서 전라북도 출신자가 학대를 받고 있다고 곡해하여 동 광 제1협화 합숙소에서 전라북도 출신자 56명의 도움을 받아 각자 곤봉을 들고 복수하고자 협화 합숙소를 습격하였다(관할서 조정으로 설득).

 

45 유바리군(夕張郡) 유바리(夕張)광업소(참가자 조선인 전원 238명 중 40명)

12월 11일 눈보라가 상당히 심한 날씨로 인해 근무를 거부하려고 했으나 담당자 설득을 통해 238명이 근무했음. 그러나 40명은 꾀병으로 일을 하지 않았고 다음 날 12일 눈보라가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태업을 지속함(관할서 설득으로 해결. 주모자 12인은 엄중 훈계).

 

46 유바리군(夕張郡) 유바리(夕張)광업소(참가자 조선인 전원 118명)

갱부 김판동이 내지인 노동자 나카가와 쓰요시와 작업 때문에 싸우다 머리에 치료 10일을 필요로 하는 상해를 입은 것이 발단으로 되어 내지인 노동자와 공동작업은 불안하니 반도인 만으로 구성된 작업장을 만들어달라고 요구, 파업함(회사 측 및 관할서 설득을 통해 해결. 나카가와 쓰요시를 상해죄로 검거).

 

‘분쟁의일람’은 각지의 경찰관들로부터 받은 보고를 ‘월보’ 편집자가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생각한다. 탄광이란 3D 노동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현장이며, 조선인 갱부 중에 이에 반발하여 일본인과 다툼이 일어나고 때로는 집단으로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건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점은 가혹한 노동조건과 동시에 민족의식과 문화마찰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분쟁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갱부는 조선 남부 농촌 출신 청년들이며, 일본은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이문화의 땅일 것이다. 이 이문화에 대해 그들은 호기심보다 틀림없이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일본에는 정말 특이한 것과 기이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밥그릇을 왼손으로 들고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조선인 처지에서 보면 ‘거지’가 먹는 방식이다. 그들은 식기를 그대로 두고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이 ‘거지가 먹는 방법’을 올바른 식사예절로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이는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셈이다. 분쟁 등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1, 2에서 말하듯이 ‘지옥’과 ‘민족차별’이라고 보아도 되는 것일까. 15건의 사례가 알려주는 것은 첫째로 노동조건과 함께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와 민족의식이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며, 출신이나 대우를 이유로 조선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둘째로 조선인 갱부와 일본인 갱부 사이에 때로는 적대의식과 반목이 있기는 하였으나 함께 작업에 종사했다. 만약 이를 ‘열악한 노동조건’이라고 한다면 즉 일본인 갱부도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함께 일했다는 뜻이 된다. 갱내의 작업은 5~10명 정도의 일본인과 한국인 혼성팀(조)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보면 1, 2에서 묘사된 ‘지옥’과 ‘민족차별’의 풍경은 오늘날의 자긍심이 높은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나타난 풍경이고 일본인의 ‘악마성’이 과장됨과 동시에 조선인의 ‘희생자성’과 ‘무구성’이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의 상상력과 창조성은 거의 항상 자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뒷받침됐다. 하시마를 무대로 한 소설 ‘군함도’(일본어 번역 사쿠힌사(作品社), 2009년)의 작가 한수산을 소개하는 ‘도쿄 신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있다.

 

47 소설 군함도한국인 작가 한수산 씨에게 듣다

일본인 화가 마루키 이리, 도시(丸木位里, 俊) 부부가 나가사키 원폭을 그린 작품 ‘원폭의 그림 제14부 까마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세로180센티, 가로 720센티의 화면을 뒤덮는 까마귀 무리. 쓰러진 사람 위를 한반도의 전통의상, 한복이 날아간다.

 “1991년에 원폭의 그림 마루키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소설의 원제 ‘까마귀’도 이 그림에서 따왔다. 마루키 부부는 화가로서 그림으로, 저는 작가로서 소설의 형태로 그저 원폭이 안 좋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원점이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했다”

 ‘군함도’에는 원폭 투하 후의 모습뿐만 아니라 ‘징용’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강제로 청년들이 모집되는 모습과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가혹한 취급, 탄갱에서의 열악한 대우 등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나가사키시의 목사 오카 마사히루씨(고인, 岡正治)가 정리한 ‘원폭과 조선인 제1집~제6집’을 비롯하여 일본, 한국 양쪽의 자료를 보았다. 오카씨와 군함도에서 일한 후에 원폭을 맞고 살아남은 동포로부터 체험담을 들었다”

 

하시마의 조선인 갱부의 ‘피해자 체험’에 대해서는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만 보더라도 많은 작품이 남겨져 있다.

 

48 하야시 에이다이(えいだい) ‘치쿠호군함도조선인 강제연행, 그 후’ (겐쇼보(弦書房), 2010)

하시마 탄갱의 노동자 수는 채탄사업 확대와 동시에 증가 일로를 걸어, 가장 성했던 시기인 1945년에는 약 5300명에 이르렀으며 섬에서 넘쳐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이 겹치듯이 생활하다 보면 과한 밀도가 거주하는 이의 정신상태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흙이 없는 생활, 힘든 노동에 찌든 특수한 환경. 녹지가 없는 섬 주민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3, 4층 목조 건물이었던 것이 어느새 8, 9층짜리 철근아파트로 변했다. 입추의 여지도 없는 땅에 빌딩이 죽 늘어서면 가장 아래층은 햇빛도 충분히 들어오지 않고, 대낮도 밤처럼 어두웠다. 갱부와 가족들은 마치 골짜기 밑에 있는 듯한 삶을 강요받았다. 당연하듯이 어두운 아래층에 조선인의 합숙소, 조선인 가족들을 입주시켰다.

그에 비하면 상층 부분은 일조시간이 길고 전망도 좋고 거주성이 뛰어나다. 그 별천지에는 하시마 탄광의 엘리트들이 살았다. 하시마의 아파트는 지위와 직종에 따라 배분되었다.

운명공동체로서 일본인끼리의 연대감은 강해졌지만,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차별은 한층 심해졌다.

하시마 탄광은 일본인 갱부가 중심이 되어 채탄했으나 다이쇼 시대가 되자 조선인이 많이 일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는 조선인 강제연행자는 요시다 합숙소를 포함해 약 500~600명. 이에 자유 도항으로 가족과 함께 온 약 80명이 일하고 있었다(158, 162쪽). 

 

반대로 하시마에서 일본인 갱부와 조선인 갱부의 운명 공동성을 전해주는 담론은 압도적으로 적다.

 

49 이와시타 규조(岩下久蔵) “다리가 있는건가?” (‘석탄의 빛’ 125호, 1955 or 60년 6월)

오랜 갱내 근무를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두려웠던 추억이 많이도 떠오른다. … 쇼와11년 10월의 이야기를 하겠다.

첫 차례 입갱은 당시 아침 6시. 우사좌6편12척 전층불(右卸左六片十二尺全層払)의 채탄 장소에서 재료 배치를 마치고 우리가 석탄을 자르기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땅 파기면 중앙부 천장이 갈라져 동굴의 물과 버력이 와르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빨라 컨베이어 갱도로 통하는 작은 석탄 유입구는 금방 막혀버렸고 순식간에 도망칠 곳을 잃어버렸다.

나(당시 채탄 숙련 갱부 27세)와 조선인 장리 씨(상병 숙련 갱부)와 같은 조선인 백순 3명이 독 안에 든 쥐 같은 처지에 빠졌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는 물은 끊임없이 버력을 밀어냈고 우리의 발밑을 씻으며 밑에 고이기만 했다.

물이 서서히 차올라 ‘이제 끝이구나’하고 각오를 했다. 백순이 울고불고 난리여서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런데 의외로(하늘이 도왔는지) 수량이 줄고 흘러나오는 속도도 느려졌다.

‘그래, 이제는 살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겨 장리 씨도 우리를 격려하고 아무튼 버력을 막기로 했다. 3명이 목숨을 건 작업. 서로 매우 진지했다.

그러나 차단된 갱내는 온도가 상승하고, 가스 탓도 있어 작업이 점차 힘들어졌다. 에어 파이프에서 나오는 끊길 듯 말듯한 신선한 공기에 3명이 입을 갖다 대며 숨을 나눠 쉬었다. 그 당시 11시가 되면 에어가 멈추기로 되어 있었다…

에어 압력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11시 반이다”라고 말하자마자 갑자기 에어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직관적으로 구조대가 왔음을 깨달은 우리는 프레임을 두드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4시간 반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3명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갱장을 비롯하여 걱정해서 모인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의 말을 듣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맛보고, 현장에 온 의사, 간호사의 도움도 없이 갱 밖으로 나온 내가 들은 첫말은 “당신 정말 다리가 있는건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