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9NEW

사사야마 이사무 씨 인터뷰 ①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 가토 코코

"리 사이우 씨에게 불리고 현관에서 김치를 먹었다"

사사야마 이사무 씨의 자택은 나가사키 만(湾)에 둘러싼 산의 경사면에, 주택이 많이 있는 작은 산 중턱에 있습니다. 2017년 1월 5일, 미야자키에 사는 마쓰모토 사카에(松本栄) 씨의 소개로 사사야마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나가사키를 방문할 때 해 질 무렵에 갑자기 방문하는 일이 많았지만, 늘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사사야마 씨는 표주박 만들기 명인으로, 현관에는 아름다운 표주박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재 93세 사사야마 씨. 해가 질 무렵,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단에서 아쉬움 듯이 배웅해 주셨습니다. 전쟁 중, 하시마에서 미쓰비시 광업 기계 공작 과(三菱礦業機械工作課)에 소속. 대만에서 종전을 맞아, 전후 근로 과에서 내근(内勤)도 외근(外勤)도 경험하고 계십니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로, 하시마 자택에 신자님을 모아 예배를 했다는 이야기가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부드러운 말투로, 유머 넘치는 이야기.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사사야마 이사무 씨

――생일은 언제입니까?

사사야마: 다이쇼1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4명 형제. 남, 여, 여, 남. 교회 아래에서 태어났어요. 하시마에 간 것은 쇼와6년입니다.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사사야마: 장난을 많이 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부하를 데리고 놀러 다니고. 그래서 이런 부상을 했어요. 7살 때. 나무의 트럭으로 "모두 따라와"라고 앞장서서. 유치원을 졸업 할 때입니다.

――그럼,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하시마에서 다니셨나요?

사사야마: 하시마 심상 고등 소학교(端島尋常高等小学校)입니다.

미쓰비시에 취직

――전쟁 중, 하시마에 계셨습니까?

사사야마: 육군을 지원해서 고등 소학교를 졸업. 16 살 나이에 미쓰비시에 취직했습니다.

――근로 과(勤労課)에서 업무 하셨잖아요?

사사야마: 내근도 외근도 경험했어요. 외근이 더 길거든요. 詰所(쓰메쇼) 즉 직원을 관리하는 동이 있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사사야마: 군대에서 돌아왔을 때, 쇼와 21 년부터. 21년4월 말. 24 일에 돌아오고, 5 월1일이 노동절이니까, 2일부터 근무했습니다. 정년까지. 하시마 폐산 처리를 끝까지 하고, 내일부터 선박이 하시마에 다니지 않는다는 그때까지. 다카시마 총무 과에서 일했습니다.

――마쓰모토 사카에 씨 이야기로는, 근로 과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사사야마: 꼭 알아야 합니다.

 

마쓰모토 사카에 씨 (오른쪽)와 사사야마 씨. 사고 때는 오른쪽 그림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었다고 마쓰모토 씨는 말한다.

――내근, 외근, 차이는?

사사야마: 내근은 내무. 외근은 직원을 관리합니다. 각 직원과 가족의 후생(厚生) 등.

――모든 직원의 얼굴과 명단을 가장 잘 아시죠?

사사야마: 네. 詰所(쓰메쇼)가 두 군데 있었어요. 섬 전체 직원을 관리했어요.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외근 사람은 대체로 알고 있었을까요?

사사야마: 네, 외근에서 내근에 연락하고, 내근은 월급 지급, 결제 업무 등.

――갱내에 가셨나요?

사사야마: 전혀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각자의 매일 출근 상황을 파악합니다. 詰所(쓰메쇼)에 근무했을 때, 누가 오늘 어떤 사정으로 쉬고 싶다고. 그것을 내근에 연락합니다.

――인사 배치는 어디에서 하고 있었나요?

사사야마: 내근에 입갱(入坑)소라는 직장이 있었어. 직원들이 오늘 출근한다는 식으로. 하시마로 말하면, 내근 위 2층에 갱무(坑務)과가 있었어. 그리고 1층 램프 룸에서, 램프를 빌려 입갱 증을 발급합니다. 詰所(쓰메쇼)에서 쉬는 사람을 파악하고.

배터리 실 램프 실 (사진 제공 : 하시마 동창회)

――근로 과는 1층이네요.

사사야마: 1층 근로 과 방은 절반뿐. 램프 실, 목욕탕이 있고, 위층 갱무 과. 繰り込み(구리꼬미, 탄광 부 대기소의 의미)는 총무과와 연결되어 있어요. 여기서 직원이 출발하거나 도착합니다.

――1층도 2층도 목욕탕이구나.

사사야마: 맞아요.

――양쪽에 탕이 있다.

사사야마: 총무 과 위층이 경리 과.

――아, 그래요.

사사야마: 나도 여기서 나간 적이 없어요. 아내가 있는 곳과 왕복하는 것이 하루의 일이니까.

하시마 목욕 모습 (사진제공:하시마 동창회)

입갱소 (사진제공:하시마 동창회)

"일요일 예배는 집에서 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사야마: 네, 태어났을 때부터. 가톨릭.

――하시마에서 예배하셨나요?

사사야마: NHK가 취재를 했어요, 하시마에서 예배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6시 방송에서 좀 소개되고, 사람들이 "사사야마 씨 TV에 출연했구나"라고.

――자택에서?

사사야마: 하시마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카시마에 있었어요. 일요일은 다카시마에 가거나 나가사키에 가거나.

――그럼, 일요일 예배는 사사야마 씨의 집에서 하셨구나.

사사야마: 28명쯤, 아이들도 있었어요.

――가톨릭 신부님이 계셨나요?

사사야마: :다카시마에서 오셨어요. 섬의 신자를 모아서, 우리 집에서 예배했어요. 40 년대. 49년에 폐광한 무렵. 야마다 수에꾸마 씨, 3호 사택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교회 일을 도와주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30년대 초반쯤. 폐광될 때까지.

――사사야마 씨가 일요일 예배하고 계셨을 때, 조선 사람은 없었습니까?

사사야마: 없어. 그건 전후.

――전시 중은 종교 활동이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요?

사사야마: 전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조선반도 출신자와 교류

――조선인과 교류는?

사사야마: 동급에 있었어요. 리 사이우. 내가 귀국 했을 때, 그들은 없었어요.

――그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셨나요?

사사야마: 학교에서 함께 지냈어요. 몇 명 있었지요. 학년이나 성적이 달랐지만. 저 같은 경우는 그리 접촉하지 않았지만. 동급생과 함께 지냈고 얘기도 나눴지요. (대만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거의 귀국 한 후이었어요.

――귀국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나요?

사사야마: 그들에 대해서 거의 몰랐어요. 외근이니까 알아야 하는데. 詰所(쓰메쇼) 는 직원에 관한 것뿐이니까.  

――하시마를 떠나서 언제까지 군대에?

사사야마: 쇼와18년 9월부터 2년간.

――대만?

사사야마: 맞아요.

――그럼 그때까지는 하시마에서 조선인과 함께 지내셨나요?

사사야마: 네, 18살 때.

――그때는 내근?

사사야마: 공작(工作)과 입니다.

――그중에 조선인은?

사사야마: 없었어요.

――갱내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사사야마: 네.

――이노우에 씨를 인터뷰했을 때, 전시 중, 갱내에서 함께 일했다고 들었어요. 탄차(炭車) 담당이었대요.

사사야마: 그랬을지도 몰라. 그는 갱내 사정을 잘 알았어요. 거기서 일했으니까. 저는 잘 몰라요. 총무 과, 그리고 전시 중은 공작 과에 있었고, 그것만 했으니까. 외부와 접촉이 그리 없었어요.

故이노우에 히데시 씨

――갱내 사정을 잘 모를 수 있지만, 조선인만 작업복이 없었다. 그런 것은 있었나요?
서적"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에 、"그들은 이곳에서 훈도시(들보) 한 장만을 몸에 걸치고, 서 있지도 못한 채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석탄을 캐야만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사야마: 그런 옷차림으로 일은 못 해요. 탄광 일은 지하 몇백m에서 일하니까. 일본인도 조선인도 마찬가지. 하시마는 비교적 융화하게, 차별이란 있었을까, 하는 정도이에요.

서적"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기록-

――하시마 공작 과에 군인은 있었나요?

사사야마: 군대는 없었어요.

――헌 병(憲兵)은?

사사야마: 없었어요. 사건이 있으면, 나가사키에서 왔어요. 경찰과 함께 수사했어요.

――갱내에서 사고가 있으면, 측량(測量) 반이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사야마: 당연히 그랬는데, 갱무 과가 처리했어요. 총무도 관계있고. 병원에 운반하거나, 그 후 상황 등 대응도.

――사고가 있었을 때, 총무 과도 대응 하는 건가요?

사사야마: 네.

――학대는 어땠어요?

사사야마: 저는 잘 몰랐어요. 전후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싸운 적은?

사사야마: 우리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런 장면을 보고 경찰이 대응했던 것 같아요.

――경찰이 대응하는 큰 싸움?

사사야마: 복잡할 때는 그랬어. 경찰은 반드시 조사해요.

――부주임 급 조선인이 계셨다고 들었어요.

사사야마: 사택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생활도 일본인과 전혀 다름없었고. 조선인 사택에 불리고 드문 조선 요리를 먹었어요.

――숙소에서 요리 할 수 있었나요?

사사야마: 숙소가 아니라 사택. 취사장도 있었어요.

――사사야마 씨는 몇 호 동에 계셨나요?

사사야마: 30호 동에도 있었어요. 일 년쯤. 그 후, 17호 동에 가서, 65호 동에 갔어요.

30호 동

17호 동

65호 동

――조선 요리를 먹은 것은 언제쯤?

사사야마: 청년 시절.

――도민들은 가족 같네요.

사사야마: 그래요, 다른 곳은 잘 모르지만.

――몇 호 동에 가셨나요?

사사야마: 리에 불린 것이 아니라, 현관에서 그냥 먹어봐, 라는 식으로.

――리 씨도 17호 동에 살았어요?

사사야마: 19호 동. 아마 이 층에 살았어요.

――사사야마 씨는 17호 동에 사셨나요?

사사야마: 네, 9층.

――리 사이우 씨에 불리고 대접을 받았다.

사사야마: 대접이라고 할까, 현관에서 김치 등을 좀 먹어봐, 라는 식으로.

――함께 놀았어요?

사사야마: 응, 우리보다 우수했어요.

――학교에서도?

사사야마: 응, 하지만 좀 소극적이었어요. 검도(剣道)를 저도 소학교 때부터 했고, 그것을 하는 조선인 선배도 있었어요.

――리 씨도 검도를 하셨나요?

사사야마: 안 했어요.

――사택에 사는 조선인 중,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사야마: 들은 적이 없어요.

――리 씨, 최 씨. 이렇듯이.

사사야마: 맞아요. 전종 직후에 귀국했어요.

――섬에 있을 때, 사이가 좋았다.

사사야마: 네.

――학대 등은 없었나요?

사사야마: 없어요. 일본인과 다름없었어요.

사사야마 씨와 필자

인터뷰 모습




(다음 회에 계속)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
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