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31NEW

쓰보우치미쓰오키씨 인터뷰 ②

일반재단법인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가토코코

"파리와쥐를가지고가면회사가사줬다. 그래서아이들도뭐든지살수있었다"

도쿄에사는쓰보우치 미쓰오키씨(87). 1961년에 도쿄에 갈때까지전쟁 중그리고 전쟁 후하시마섬을계속 바라본사람이다.수차례에걸친인터뷰에서전쟁중에조선인노동자들과의교류등당시추억을들었다.제2회는 유머 가득한쓰보우치 씨인터뷰를소개한다.

하시마섬에서지낸소년시대

――하시마섬에는쥐, 바퀴벌레, 파리도많이있어서, 그것을잡고가져가면회사가사줬다.그래서아이들도용돈을벌수가있었다――

 

――소년시절의추억에 대해서들려주세요.

"파리,쥐는회사가사줬어요. 한 마리로얼마, 백 마리로얼마이었을까. 그것을 잡아서 회사에 가져갔어요"

――그것으로 용돈을 벌 수 있었구나.

"그래, 뭐든지살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갱내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아니, 갱외"

――아파트?

"그래. 쥐 잡는 것도 어려워서 오래 못 했을 거야. 파리 잡기를 사용해서 파리로 상자를 가득 채워서 회사에 가지고 갔어요"

하시마섬의오락――영화・파친코――

――쇼와관(영화관)에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섬의 오락에 대해서 들려주세요.

"쇼와 32년부터 쇼와관에서 근무했어요. 그 당시 월급은 얼마이었을까. 7000엔 쯤이었을까. 영화관은 늘 사람들로 가득했어"

――전쟁 중에 영화를 상영 했나요?

"했어요"

――아이들은 들어갈 수 있었나요?

"상영 시간 끝날 무렵에 문을 여니까 그때 조금만 볼 수 있었어"

――영화관에는 조선인도 있었나요?

"일본인도 조선인도 있었어"

――영화 상영 기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을까. 영화는 거의 매일 바뀌었어. 그때는 서양영화는 없었고 일본 영화만이었어. ‘타잔’영화는 상영 했었을까"


쇼와관(촬영년불명)



――파친코도 있었구나.

"그 당시 오락은 영화관, 파친코, 스마트 볼이었어. 파친코는 지금은 어른들의 놀이이지만, 그 당시는 아이들의 놀이이었어"

――아이들의 놀이이었어요?

"나가타 상점은 학용품을 팔고, 나카야마 상점은 주로 담배를 팔고 파친코와 스마트볼도 운영했어요. 우리도 시간 있을 때 파친코를 해서 놀았어요. 그 외는 가나가야 상점(일용품) 그리고 술집이 있었어요. 파친코 기계도 전동이 아니고 손으로 조작하면 튤립이 피고…. 그후 어른들이 놀기 시작해서, 아이들에게는‘놀지 말라’고 했어요"

――상점아저씨가운영했어요?

"그래요"

――아이들도 돈을 냈어요?

"아이들이니까 그리 비싸지 않았어"

――아이들의 놀이이었구나.

"그리 비싸지 않았어"


나가타상점(촬영년불명)



하시마의목욕에관해서

――그 당시,숙소에 목욕탕은있었나요?

"없어요"

――공동 목욕탕?

"그래요"

――조선인도 있었나요?

"그래요. 하나밖에 없으니까"

――차별이랑 없었나요?

"없어요. 냉탕은 주에 두 번, 그 외는 바닷물을 끓인 해수탕이 있었어요"

――검댕으로 더러워진 몸을 어디에서 씻었어요?

"목욕탕에서 씻었어요"

――목욕탕에서?

"그래, 옷을 입은 채로 씻었어요"

――옷을 입은 채로?

"그래, 그냥 씻었어요"

――일본인도 조선인도 함께 들어갔어요?

"그래, 목욕탕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일이 끝나면 거기서 옷을 입은 채 몸을 씻었어요?

"목욕탕이 두 군데 있었어요. 한 군데는 작았지만. 거기서 작업복을 씻었어요"

당시하시마섬을설명하는쓰보우치씨(촬영:무라오마사미)



하시마섬의중국인노무자에관해서

――아버님은 중국어를 잘해서 하시마섬에서 중국인을 돌보셨다고 들었습니다.중국인에 관해서 어떤 얘기를 들었습니까?

"중국인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집단으로 행동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중국인 노동자의 책임자이었어요. 중국인은150명가량 있었을까"

――그들은 가족이 있었나요?

"중국인은 다들 독신이었어요"

――"중국인 노무자가 콩 찌꺼기밖에 먹을 수 없었다"는 증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전쟁 전이겠지. 물자가 부족해서 먹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마찬가지이었어"

――아버님은 갱내 현장 감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들과 노동 현장까지 같이 갔어요"

――그때 얘기는 들었습니까?

"노동자들 숙소에도 자주 갔었대요"

――누가?

"아버지"

――아버님이 숙소에서 중국인들과 얘기하셨나요?

"아마 그렇겠지. 중국의 빵 같은 것을 받고 돌아왔어요"

――중국인 숙소에도 식당이 있었나요?

"당연히 있었어"

――어디에있었나요?

"여기, 30호 동 곁에 목조건물이 있었어요"

하시마섬장례에관해서

――쇼와13년(1938), 소학교      1학년이었던 쓰보우치 씨가 세살 때 남동생의 장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중일전쟁에 갔을 때, 여동생 아래 막내 남동생이 세살 때 죽었어요"

――어디서 장례를 하셨나요?

"우리 집. 화장 터는 나카노시마에 있었어요"

――배를 타고 가셨나요?

"그래요"

――다들함께?

"사공도함께탔어요"

――관을 배에 싣고?

"장작을 싣고 가요"

――가족들도함께갔어요?

"가야할사람이해안에서 타고갔어요"

――쓰보우치 씨도 가셨나요?

"아버지 대신에 갔어요"

――그랬구나. 시간이 얼마나 걸렸어요?

"십분쯤. 두, 세명이함께배에탔어요. 화장터에서는장작위에또장작을놓고, 불태우고, 지금처럼석유나전기가아니니까요"

――납골항아리도가지고갔어요?

"불태우고한번집으로돌아가고, 이튿날다시갔어요"

――가족들이납골항아리에뼈가루를담아서돌아왔어요?

"내가혼자갔어요.

――어머니도가셨나요?

"안갔어요"

――쓰보우치씨는그때몇살?

"일곱 살, 소학년1학년이었어요"

――그 때 남동생은 몇 살?

"세 살이었어요"

――무슨 병으로 돌아 가셨나요?

"무엇이었을까. 종기가 많이 생기고 치료도 받았어요"

――의사가 집에 왔었구나.

"그래요"

――그때어머님은너무서운하셨겠죠.

"쇼와12년, 남동생은한살반으로죽었어요. 그때는여동생이있었어요"

――이튿날나카노시마에가서, 뼈가루를항아리에담았구나.

"뼈가루는조금만. 남은뼈가루는  좀떨어진구멍에버렸어요"

――(남독일신문기사를낭독) "군함도라고불리우는하시마섬에서강제노동자들은괴롭힘을당했다. 대전중일본인은안전한구역에도피하고, 중국과한국의노동자들을대체했다. 1,000명이상이이섬에서죽었다. 강제노동자의시체는바다와폐갱에버려졌다"  이폐갱은하시마섬인가요?

"그런것은있을수없어, 아무리생각해도!! "
남은뼈가루는항아리에담으니까, 일본인조선인차이 없어요"

――폐갱은 나카노시마?

"바다에 버리지 않기때문에 아마 그렇겠지"

――나카노시마 화장터에서 줍지 못했던 뼈를 폐갱에 버렸다는 뜻인가요? 그런 이야기가 확산 되었을지도 모르네요"

"하시마섬에 화장터는 없었으니까 아마 그렇지"

――장례는집에서,  화장은나카노시마에서, 그때항아리에담지못한뼈가루를폐갱에내던졌다, 그런뜻인가요?

"하시마섬에는버릴곳이없어서바다에버릴수밖에없어. 폐갱에내던졌다는것은아마그런뜻이지. 버릴곳은나카노시마밖에없으니까요.

원폭투하시의하시마섬에관해서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시간, 어디에 계셨나요?

"65호 동의 근처에서 남동생과 함께 놀고 있었어요. 하늘이 뻔쩍 빛나고 검은 구름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그때 건물 유리창은 깨졌나요?

"멀기 때문에 깨지지 않았어요"


쇼와49년(1974년) 하시마섬
(출처:하시마 노동조합1966 “군함도하시마노동조합해산기념사”를기초로작성)




쓰보우치씨와필자(2016년 1월 8일, 쓰보우치씨자택에서)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하시마섬 생활은 정말로 좋았어. 도쿄를 이미 알았다면 오지 않았다" "조선에서 보내온 밤을 쉬는 시간에 조선인 동창생 세 명과 함께 먹었다" "어릴 때, 상영 시간이 끝날 무렵에 영화를 봤다" "소학생 때 남동생이 죽어서, 나카노시마 화장터까지 갔다"등등. 어느 새 쓰보우치 씨의 얘기에 빠져들어 갔다. 전쟁 중의 하시마섬의 기억들이 하나씩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카토 코코 (Koko Kato)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세계유산협의회 코디네이터,
야마모토 사쿠베이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산업프로젝트 팀 코디네이터,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록 추천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추천서 다이제스트 판”,
공식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서적, DVD, WEB사이트의 주필 및 디렉터
전 쓰쿠바 대학 객원 교수 (2014 년 4 월 1 일 ~ 2016 년 3 월 31 일)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 이사.
2015 년 7 월부터 내각 관방 참여.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국제회의통역을 거쳐 미국 CBS 뉴스 도쿄 지사에 근무.하버드 케네디 스쿨 대학원 도시 경제학 석사과정 (MCRP)을 수료.그 후 일본에서 기업.국내외 기업 성시의 산업유산을 연구 한다.저서‘산업 유산’(일본경제신문사,1999 년) 외,세계의 기업 성시의 도시 계획을 광산 ·제철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개.‘이코노미스트’‘학탑(学塔)’‘지리’등 각지에 논문,에세이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