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NEW

일본 최고의 인구밀도 하시마(端島)에서의 생활

전시의 석탄 수요를 책임졌던 하시마 사람들의 생활은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로 구조의 고층집합주택에서 생활하는 하시마만의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당시 하시마 생활의 개요를 소개합니다.

 

일본 최고 인구밀도의 섬

일본 최고의 인구밀도였던 하시마에는 탄광 직원과 그 가족, 갱내부, 갱외부와 그 가족 등 약 3200명이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의 고층집합주택을 중심으로 좁은 섬 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24시간 2교대제(전쟁 후는 3교대제)였던 하시마 탄광은 말그대로 불야성으로 섬에는 탄광 생산시설 외에 사무소, 주택은 물론 병원, 학교, 식당, 공동목욕탕, 신사, 절, 상점, 영화관, 여관, 유곽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고, 당구장 등 오락시설도 있었습니다. ‘하시마 긴자’라 불리던 노천시장에는 바다건너 노모반도(野母半島)의 다카하마(高浜)에서 농어민이 행상으로 찾아와 비 오는 날도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바닷물이 내리는 거리

바다가 거칠어지면 방파제에 부딪힌 파도의 물보라가 아파트를 넘어 하늘에서 내리는 ‘바닷물 내리는 거리’라 이름 붙여진 구역도 있었습니다. 1927년에 세워진 기와구조의 2층 건물의 400석 규모의 영화관은 ‘쇼와관’(昭和館)이라는 이름이었지만, 파도의 물보라가 심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섬에서 가장 바닷물이 쏟아지는 곳에서, 철썩하고 바닷물이 지붕을 울린다」라고 잡지(「주부의 벗 3월호」1956년3월1일 발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쇼와8년(1933년)에 하시마를 방문한 작가 에미 스이인(江見水蔭)은 저서 『스이인 여행 전집(水蔭行脚全集)』 제5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용궁처럼 각 건축물의 전등이 빛나니, 바다위의 백화점인줄 알았다」「신사, 학교, 사원, 극장, 요리집 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바다위의 이상향. 현실의 극락도(極楽島)」「갱부들도 옛날처럼 거친 기질은 없고, 주의자(=좌익사상의 사람들)가 와도 구호구제기관이 정비되어 있으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일본최초의 고층주택

하시마의 심볼은 일본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고층집합주택입니다. 다이쇼5년(1916년)에 세워진 7층의 거대한 ロ자형 아파트(30호동)에서는 정방형의 중앙정원을 둘러싸도록 다다미6조 한칸의 주거가 각층에 늘어서 있고, 합계 145호가 있었습니다. 화로는 각 호마다 있었습니다만 개수대는 복도에 공용으로 설치되어 빨래를 그곳에서 했습니다. 다이쇼7년(1918년)에 세워진 ‘일급사택’(日給社宅)이라 불린 9층 건물은 총면적 1만2천평방미터로, 255호의 거대한 고층집합주택입니다. 각 호에는 두 칸의 거주 공간이 있어 부엌에는 화로뿐만이 아니라, 개수대도 설비되어 있었습니다. 통로 등의 공용공간은 취사, 세탁 외에 저녁에 바람을 쐬거나 어린이들의 놀이공간 등 주민들이 교류하는 공간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또한, ‘일급사택’ 의 1층 부분의 반지하에는 130명의 조선인노동자가 살고 있었다고 쇼와11년(1936년)10월 발행의 『주부의 벗(婦人之友)』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귀중한 물과 공동체 의식

하시마에서 생활용수는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담수는 급수선으로 섬까지 운반되어 가장 높은 지역에 있던 저수탱크로부터 공급되었습니다. 각 호에서는 물항아리를 놓고 물을 소중히 사용하였습니다. 일급사택에서는 각 층에 담수용과 해수용 두 개의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시간을 정해 물을 공급했습니다. 담수는 2두(약36L)가 1전5리에 판매되었습니다. 해수는 무료였으므로 갱부들의 집에서는 빨래와 청소는 물론 식기세척과 쌀씻기까지 해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가 결항이 되기 때문에 담수의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공동목욕탕은 섬 안에 세 군데 있어, 하나는 사업소내에 있는 갱내에 들어간 사람들을 위한 것, 또 하나는 9층건물의 일급사택에 있던 갱부의 가족용, 마지막 하나는 직원 가족용이었습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가장 먼저 해수로 바뀌는 것이 욕탕의 물” (「주부의 벗」쇼와11년(1936년)10월 발행)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물과 관련된 엄격한 환경이 하시마의 공동체 의식을 높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섬의 어린이들과 학교 교육

하시마에는 어린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메이지26년(1893년)11월3일에는 미쓰비시사에 의해 하시마소학교를 개교되었고, 후일 공립학교가 됩니다. 「다카하마무라 현세개요(高浜村現勢概要)」(다이쇼15년6월30일 발행)에는 다이쇼15년(1926년)4월1일 현재, 하시마 심상고등소학교에는 심상과 6학급, 고등과1학급, 보통교실 7실, 재봉실 1실, 이과실 1실, 재적아동 376명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쇼와9년(1934년)에는 새 교사가 완성. 쇼와 16년(1941년)에는 다카하마무라 심상고등소학교는 하시마 국민학교로 개칭됩니다. 당시의 하시마를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조선인노동자의 아이들도 고별없이 통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시중의 어려운 식량사정

하시마의 전시중 배급사정은 전황이 악화되어가며 물자부족에 빠지게 됩니다. 쌀 대신에 배급된 식량은 기름 채취용 콩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로 ‘탈지대두’라 불렸습니다. 당시를 아는 하시마의 사람들은 탈지대두 때문에 자주 설사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노동자의 증언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만, 당시 섬 전체의 식량사정이 어려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