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으로 인정 자연발화 가스폭발> 1935년(쇼와 10년) 3월 27일 나가사키 니치니치 신문
하시마 최대의 가스 폭발사고
하시마 탄광 최대의 가스 폭발 사고. 나가사키 니치니치 신문에서 호외까지 발행하며 사고의 상세 내용이 보도되었다. 갱내 구출에 나선 최고 간부가 2차 폭발에 휘말려 사망. 보도에 따르면 30일 석간 시점에 이 사고에 의한 사망자가 27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망자 명세는 일본인 18명, 조선인 9명이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갱부에게만 위험한 일을 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당시 하시마는 총인구 3천2백 명, 직원 1천명 중 갱부 7백 명.(나가사키 니치니치 신문)
나가사키 니치니치 신문(1935년<쇼와 10년> 3월 27일 호외)
나가사키 항외 하시마 탄광 가스 대폭발 참사 상세 보도
죽음의 2천 척 갱 바닥에 남겨진 7명의 운명
중상 3명 사망 탄광병원에 수용 치료 중 ‘안전제일’의 갱구 앞에 고개를 떨군 갱부들
탄광 최고 간부의 용감한 책임감 오가와 부장(小川副長) 이하 목숨 바쳐 일하다 중상
저작자:자료제공:국립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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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조작업(위) 갱구에 망연히 서 있는 사람들
(사진)(아래) 구조기구를 실어 내는 사람들
(사진) 위문객이 줄줄이 상륙하는 하시마 부두
불가항력으로 인정
자연발화 가스폭발
하타케시마(畑島) 우메가사키(梅香崎) 경찰서장이 말한다
원인 및 경과에 대하여 즉시 현장 조사를 실시한 하타케시마 우메가사키 경찰서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인은 자연 발화하여 가스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며 오가와 부장 이하 간부가 총동원되어 적절한 조치를 했음에도 오후 11시경에 폭발한 것으로 보이므로 불가항력이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행방불명인 7명의 생존은 전혀 가망이 없고 구조에 나선 자 역시 위험하여 되돌아온 사실로 봐서 이 구출작업은 완전히 절망적이라 생각된다. 또한, 광산감독국 기술자 등의 조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불가항력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안전제일’의 갱구 앞에 고개를 떨군 갱부들
다른 오르막길에서는 여전히 작업이 이어짐
참사가 발생한 하시마 탄광 제4 갱에는 채광과학의 정수가 응집된 샤프트가 마치 거인처럼 비 내리는 봄 하늘에 우뚝 서 있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곳에는 1칸 반(273㎝)과 3척(91㎝) 정도의 큰 액자에 ‘안전제일’이라고 크게 쓰인 것을 보니 아이러니함에 뒤늦게 원망스럽다. 갱구 옆 당번 오두막에서는 당번 갱부 십수 명이 빙 둘러앉아 기자의 위문 말에도 고개를 깊이 떨군 채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 참사현장인 ‘우사5편’을 제외한 다른 갱도에서는 약 300명의 갱부가 전날 밤의 참사를 떠올리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탄갱 최고 간부의 용감한 책임감
오가와 부장 이하 목숨 바쳐 일하다 중상
참사를 일으킨 하시마 탄광의 1차 폭발이 26일 오후 9시경 자택에서 잠자던 오가와 부장에게 전해지자 그는 곧바로 현장에 달려갔다. 그리고 갱부들을 인솔하여 사상자 구조와 계속 새는 유독가스 방지 작업 계획을 세워 솜씨가 좋은 갱부 십수 명을 이끌고 입갱하여 폭발 현장에서 점토로 밀폐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오후 11시경에 이르자 제2차 폭발이 일어나 갱목 파편과 암석으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오가와 부장과 함께 입갱하여 구사일생을 얻은 갱무담당 이와모토 지사키치(岩元次左吉, 42)는 무서운 광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2차 폭발 시에 오가와 부장의 인솔하에 그를 선두로 현장에 달려가서 현장에서 약 150칸 앞쪽에서 작업했습니다. 부장은 갱내 기술자 최고 간부 4명과 함께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가 점토 작업을 하던 중 아차 하는 순간 큰 소리와 함께 폭발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오가와 부장 이하 다른 분들은 용감하게도 가장 위험한 안쪽에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눈물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오가와 부장 이하 4명의 갱내 최고 간부가 목숨 바쳐 일하는 용감한 책임감에 동갱 사무소가 감격에 휩싸이고 있다.
(쇼와 10년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