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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사건 및 재해
- 사건
나오에쓰(直江津)역에서의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학살 사건
종전 직후인 1945년 12월 29일, 신에쓰(信越)선의 중심인 나오에쓰역 홈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한 청년이 조선인한테 살해당하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종전 직후의 일본 국내 교통은 매우 혼란스럽고 특히 열차의 혼잡은 심각했다. 이 사건의 발생원인은 이러한 열차의 혼잡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패전이 초래한 일이다.
사건 당일(12월 29일) 오후 7시쯤, 니가타(新潟)발 오사카(大阪)행 보통열차가 신에쓰선 구로이(黒井)역에 도착했을 때, 겉보기에 암거래상인으로 보이는 3명의 조선인 청년이 각각의 짐을 들고 열차를 타려고 했으나 만원으로 못 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손전등으로 열차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려고 했더니 안에 있는 승객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열차 덱에 매달려서 나오에쓰역까지 갔다.
이 3명의 조선인은 나카쿠비키군 야치우라무라 오아자 구로이(中頚城郡八千浦村大字黒井)에 사는 일본 이름 아오야마 시치류(青山七竜, 25), 요네무라 요시오(米村義雄, 21), 야마모토 요시오(山本義雄, 19)로 모두 전쟁 중에 나오에쓰초(直江津町)의 신에쓰화학(信越化学)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인데 종전과 동시에 해고를 당해 암거래 브로커가 되어 이날도 3명은 농가에서 각각 30킬로 정도의 쌀을 사와 이를 오사카 방면으로 팔러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열차가 나오에쓰역에 도착하자 차 안에 들어오고 구로이역에서 거부했다고 생각되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기요미즈4초메(京都市東山区清水4丁目)의 판매원 다네모리 슈지(胤森秀司, 29)에게 ‘출입구에서 못 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리창을 깨고 타려고 했는데 왜 방해했냐’라고 따지고, 다네모리가 ‘창문에서 탈 수는 없다’고 반박하자 ‘조선인에게 건방지게, 홈으로 내려와라. 죽여버릴 거야’라고 외치며 홈으로 끌어내고 맞붙어서 싸움이 되었다. 이때 조선인 3명은 각자 역에 비치되어 있던 열차 난방용 파이프나 삽을 들고 다네모리에게 덤벼들고 다네모리는 가지고 있던 해군 나이프로 이를 막았지만 끝내 머리와 왼쪽 눈 등에 10여 개 상처를 입어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담당 경찰서에서는 보고를 받고 바로 소재지의 서원을 동원하여 역에 급행했으나 다네모리는 그 자리에 이미 숨져 있었고 조선인들의 모습은 이미 거기에는 없었다. 따라서 긴급 수배했더니 노오에쓰초 후모토병원(直江津町麓病院)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위의 3명의 조선인을 찾아내 의류의 혈흔 등으로 가해자임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살인 현행범 용의자로 체포했다.
3명은 살인 현행범으로 담당 검사국으로 보내졌으나 다카다(高田)로 진주한 군정부가 개재하여 사건의 결말이 나지 않은 사이에 3명 모두 도망가서 사건은 그대로 흐지부지해버렸다.
조선인의 흉기 소지 강도 사건
종전 첫해가 지난 1946년 8월 24일 오후 9시 40분경, 겨우 낮의 더위에서 해방되어 잠이 든 지 얼마 안 된 니가타시 세키야 모토무라초(新潟市関屋木村町) 야오시게(八百重)의 사사게 다케오(捧武雄, 33)댁 정문을 막 열고 ‘미안하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면서 4명의 강도가 침입하여 2층에서 자고 있던 주인 다케오에게 갑자기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하면서 가까이에 있던 허리띠로 이 다케오의 양손을 묶고 ‘돈은 어디에 있냐’고 따지고 다케오가 옷장 안에 있다고 대답하자 그 서랍 안에서 현금 2,200여 엔 외에 양복, 코트, 흰 무명 기타를 강탈해서 도주했다.
피해자는 바로 근처의 세키야모토무라초 준사파출소로 신고하여 이로 인해 담당 니가타경찰서를 비롯하여 인접한 각 경찰서는 바로 비상경계망을 만들었다.
이 수배로 인해 히가시니가타경찰서, 기시 도시오(岸敏夫) 준사부장, 아베 로쿠로(阿部六郎) 형사, 다카하시 이사무(高橋勇) 준사 3명은 하쿠신(白新)선 시나노가와(信濃川) 철교 동쪽 끝 지점에 배치하도록 명령을 받아 정지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더니 다음날 25일 오전 1시 50분쯤 4명의 남자가 니가타역 쪽에서 선로를 따라 이 철교를 행해 걸어와 경비원에게 ‘아키타로 가려면 이 철교를 건너면 되냐’라고 물었다. 경비원은 그 얼굴과 옷차림이 수배된 강도 범인과 비슷하므로 범인이라고 인식해서 체포하려고 했더니 그들은 어둠을 이용해서 2명은 철교를 향해 도망가고 나머지 2명은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도망갔다. 기시부장은 철교를 향한 2명을 추적하고 아베, 다카하시 준사는 강 쪽으로 간 이들을 추적했다. 철교 부근에서 기시부장에게 몰린 2명은 도망가는 것을 그만두고 맞서 권총을 꺼내 ‘이건 어떠냐’라고 협박하면서 공격해왔다. 기시부장은 기회를 보고 범인에게 덤벼 체포하려다 몸싸움이 되었다. 이때 범인은 기시부장에게 권총을 발사했지만, 손목을 잡힌 상태였기 때문에 위태롭게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기시부장은 아직 저항하려는 범인과 몸싸움을 벌인 후에 경우 권총을 탈취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편 다른 범인을 추적 중이던 아베, 다카하시준사는 권총 소리에 기시부장의 위기를 느껴 추적을 그만두고 돌아와 기시부장에게 달려와 응원해서 4명이 몸싸움을 벌인 후에 이 범인을 체포했다. 기시부장은 이 상황과 함께 다른 3명의 범인의 수배도 겸해서 바로 본서에 보고하여 필요한 수배를 요청했다.
이 보고로 반대 방향에 대해 엄밀한 탐색을 했더니 이날 오전 3시 30분경, 하쿠신선(白新線) 시나노가와(信濃川) 철교 서쪽 끝의 교각 부근에 숨어 있는 한 명을 경비원이 발견하여 바로 체포했다. 그러나 다른 범인 2명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 날 26일 만다이바시(万代橋) 부근에 표착된 시체가 발견되어 검시의 결과 그 4명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시나노가와를 따라 도주 중에 전락해서 익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은 한 명은 드디어 니가타현의 경비망을 돌파하여 나가타현 밖으로 도망갔으나 전국으로 지명수배하여 계속 수사한 결과 1947년 3월에 효고현에서 체포됐다는 신고가 들어와 이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 4명조는 모두 조선인이며 주모자는 고베시고베구나카사마테도리8초메(神戸市神戸市神戸区中山手通り8丁目) 야마모토 마사오(山本正夫), 본명 최삭천(崔朔千, 25)이며 철교 부근에서 기시부장에게 권총을 발사해서 저항한 남자이었다. 하쿠신선시나노강 서쪽 끝의 교각 부근에서 체포된 것은 김정형(金亭兄, 33), 시체로 발견된 것은 읍봉기(邑奉祈, 21), 다음 해에 효고현에서 체포된 것은 안생도(安生道, 22)이었다.
그들은 나고야(名古屋) 방면에서 강도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 11월 21일, 니가타지방법원에서 최삭천에게는 징역 12년, 김정형에게는 징역8년, 그리고 안생도에게는 1947년 5월, 이 법원에서 징역 6년으로 각각 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됐다.
사건은 종전 후의 허탈 상태가 어쩌면 경찰관을 침체 상태에 빠뜨리게 하고 특히 제삼국인에 대한 경찰권 발동에도 의문이 있고 자연스럽게 각종 단속에도 적극성이 모자라는 경향이 보이는 당시 상황이었음에도 감연히 몸을 바쳐 범인과 맞서 이를 체포한 기시 부장 이하 경계 원들의 적극적이고 책임감 넘치는 근무태도는 대대적으로 칭찬받아 기시 부장에게는 1946년 11월 15일 영광스러운 경찰공적장(警察功績章)이 수여되고 다른 수훈자에게도 각각 상이 수여되었다.
p1053〜1058
사카마치(坂町) 사건
종전 후 1년이 지난 1946년 9월 22일, 우에쓰(羽越)선 사카마치역에서 암거래 쌀 수송 단속을 둘러싸고 경찰관과 중국인, 조선인 사이에 난투가 벌어진 소위 사카마치 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중에는 국내 노동력 부족의 대책으로 일본 본토에 옮겨진 중국인과조선인 기타 기존부터 일본 본토에 살고 있었던 그들은 전쟁 종결과 동시에 그 태도가 일변하여 경찰력 부족과 국내 법령이 그들에게 적용될지에 대한 해석이 확립되지 않은 사이를 이용해서 쌀 암거래, 술 밀조 등을 공연히 하여 경제 단속의 ‘암세포’가 되었다. 그러나 단속법령 적용 부분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단속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속에서는 언제나 물의를 일으켜 결국 서로의 힘의 관계로 그 자리가 정해지는, 완전히 실력 투쟁의 시대였다.
당시 니가타현 시모에쓰(下越) 방면에는 시바타시(新発田市)에 조선인연맹 사무소를 두고 그 세력 밑에 이와후네군(岩船郡) 호나이무라(保内村), 가나야무라(金屋村), 기타카바하라군(北蒲原郡) 기노토무라(乙村)를 거점으로 하여 약 200명의 조선인이 살게 되었고 사카마치(坂町), 히라키다(平木田)역을 중심으로 야마가타(山形)현 방면 및 이와후네군의 암거래 쌀을 집하·중계하여 간사이(関西) 지방으로 열차로 수송하고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태도였다. 한편 국내의 식량 사정은 극도로 악화하여 식량 배급 통제는 진주군의 명령으로 전쟁 중 이상으로 강화되어 공출 쌀 완납은 지상명령으로 경찰도 그 일익을 담당해야 하고 전력을 다해 그 공출을 독려했다.
당시 사카마치역으로부터 하루에 50짝의 암거래 쌀이 유통된다고 하여, 이를 철저하게 저지하지 않으면 담당 지역 내의 공출 쌀은 도저히 완납할 수가 없어 보였다. 따라서 무라카미(村上)경찰서에서는 경찰부의 통고도 있고 해서 철저한 단속에 나섰다.
사건 당일(1946년 9월 22일) 오전 ◯시 50분경 무라카미 경찰서의 가토(加藤)준사부장은 서장의 명령에 따라 준사 7명을 지휘하여 우에쓰(羽越)선과 요네사카(米坂)선이 합류하는 담당 지역의 사카마치역 구내에서 암거래 수송 단속 업무에 임했다. 그때 오사카(大阪)행 열차를 타려고 홈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선인, 중국인 4, 50명은 단속원의 모습을 확인하자 대부분 몸을 숨겼다. 가토 부장은 이를 확인하면서도 중앙 홈 끝에 내용이 쌀로 보이는 화물 7, 8개를 실은 운반차를 발견했기 때문에 홈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이건 누구 것이냐’라고 묻자 15명 정도의 단체 중 한 명이 ‘내 것인데. 난 중국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신분증 제출을 요구했더니 다른 사람이 갑자기 ‘때려라! 쳐라!’라고 외치면서 가토 부장에게 덤벼들었다. 가토 부장은 이를 맨손으로 막으면서 전등 가까이로 유도했기 때문에 이를 알게 된 사이토 준사가 도와주고 둘이서 제지하려고 했을 때 열차가 도착하여 그 열차에서 20여 명의 조선인들이 내려와 그들에게 가세하여 가토 부장과 사이토 준사는 경찰봉까지 빼앗기고 막 구타를 당했다. 그들은 심하게 폭행을 가해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전원이 뛰어 타 도망가버렸다. 가토 부장들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조선인 2명을 체포하여 본서로 돌아와 이 상황을 서장에게 보고했다.
무라카미 경찰서에서는 이 쓴 단속의 경험에 비추어 진용을 강화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속계획을 재검토하고 있었는데 그날(22일) 오후에 사카마치와 가나야의 양쪽 주재준사(모두 사카마치 주변에 주재)로부터 ‘조선인과 중국인이 암거래 쌀을 운반하고 있다’라는 보고가 본서에 들어왔다. 이에 따라 본서에서는 가와즈(`河津)경부보 이하 10명의 사복 경찰관이 오후 4시경 사카마치역 앞으로 가서 암거래 쌀이 숨겨진 것으로 보이는 마루야(丸屋)여관의 각 객실에 현장검사를 한 결과, 정백미 3짝분(약 180kg)을 배낭과 마대로 넣은 것을 발견했다. 투숙 중인 중국인 2명(그중 한 명은 여자)에게 그 소유자를 묻자 ‘그 사람은 가나야무라 방면으로 나갔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같은 주재준사의 조금 전의 보고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그 중국인도 자동차로 임의로 동행해서 가나야무라를 향했다.
가나야무라에서는 예전부터 조선인과 중국인과 관련이 있는 암거래 브로커 다카하시 겐타로(高橋兼太郎)가 주목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문하여 승낙을 받고 실내를 탐색했더니 대량의 암거래 쌀을 발견했으나 모두 ‘중국인들로부터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때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져서 나가봤더니 조선인과 중국인14, 5명이 장작이나 막대기를 들고 ‘당신들은 우리 중국인을 단속할 권리를 가지고 있냐’라든지, ‘마루야에 있었던 쌀을 왜 가져왔냐’라고 각각 매도하면서 습격해왔다. 경찰은 그들을 다치게 할 것을 피하고자 최대한 방어적인 자세로 나섰더니 그들은 기세를 뿌리고 경찰관을 주재소 앞으로 몰아내 자동차를 파괴하고 경찰관의 경찰 수첩을 빼서 때리고 발로 차는 등 폭행에 나서고 암거래 쌀을 다른 자동차로 옮겨 실어 가와즈경부보 한 명을 사카마치 역 앞의 마르야여관으로 연행하고 ‘죽여버려’라고 땅땅거리고 말았으나 가와즈경부보는 책임자로서 단속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대화로 해결했다.
한편 가와즈경부보가 납치된 가나야주재소에서는 가토 부장 이하 이가 갈리면서 본서에 상황을 보고하여 조선인과 중국인의 구속을 희망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가나야무라경방단에서는 경종을 울리며 단원을 소집하고 경찰을 돕기 위해 출동했으나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태도의 경찰관이 제지했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오히려 소방용 막대기와 나무칼 등을 그들에게 빼앗겼고 그들은 주재소에 침입하여 시설이나 비품을 파괴해버렸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해 가나야무라의 도야마(遠山) 의사는 전화로 진주군의 니가타군정부에 미군 출동을 요청하는 등 절박한 상황도 보였으며 사태가 더욱 험악해졌을 때 가와즈경부보로부터 ‘잘 해결됐기 때문에 사카마치 주재소로 전원 집합하도록’이라는 전화 지시가 있어 경찰관 전원은 철수했다.
사태가 뜻밖에 커졌다는 보고를 받은 이시이(石井)서장은 전원을 소집해서 오후 5시를 넘어서 사카마치 주재소에 도착해 철저한 단속을 하도록 니가타현본부와 계속 연락하면서 대책을 연구하여 시바타경찰서에서 20명의 응원경찰관을 얻어 대기하고 있었는데 진주군니가타부대로부터 정보부장 외 군정부 담당관이 도착했기 때문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구했더니 정보부장 일행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이는 마루야여관에 가서 그들에게 ‘일본에 거주하는 한 일본 법률을 따라야 한다는 것, 경찰관의 암거래 쌀 단속을 거부하는 것은 연합국 지령을 위반하는 것’을 전달해 이시이서장에게 ‘책임을 지고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귀임했다. 연합국군으로부터 단속에 대한 직접적인 지시를 받은 경찰관은 확신이 넘쳐, 여전히 반항에 나서는 그들과의 난장판을 벌이면서도 오사카시 수이타구 아사히마치 2초메(大阪市吹田区旭町2丁目)에 거주하는 중국인, 전 음식점주인 모금영(慕金英, 37) 등 11명 및 조선인 1명, 총 12명을 검거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파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신병은 그 후 무라카미서에서 니가타서로 옮겨져 군정 부원이 조사를 담당했으나 니가타현 외부로의 추방 및 다시 니가타현 내부에서 암거래 쌀 구매를 하지 않기로 서약한 것만으로 석방되었다.
니가타일보사(新潟日報社) 습격사건
상기 사카마치사건은 뜻밖의 진전이 보인 사건이었으나 추가로 그 보도 기사에 이의제기를 건 조선인 그룹이 드디어 니가타일보사를 습격하는 사건까지 발전됐다.
1946년 9월 23일 자 니가타일보 석간은 상기 사카미치 사건을 다루며 ‘MP도 출동, 사카마치에서 심야의 난두’라는 제목으로 ‘조선인 30명으로 구성된 매입 부대가 암거래 15짝(약 900kg)을 수송하려고 하는 것을 경찰관이 단속했더니 이에 반격을 가해서 싸움이 벌어져 경찰용 자동차를 파괴하고 주재소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쪽에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MP가 급히 달려가 14명이 검거되었다’라는 기사(요약)를 게재하여 다음 날 24일 조간에서도 보도했다. 요미우리(読売)신문도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당시 조선인은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조선인연맹 결성을 통해 단결하여 각지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항상 연맹 이름으로 개입하고 일방적으로 그들 처지에서만 해결하려고 했던 시대였다.
9월 26일, 조선인연맹 시바타지부위원장(윤건(尹建)) 이하 15명, 한국교민회 총무부장(소태영(蕭泰栄)) 기타 1명이 니가타일보사를 방문하여 요미우리 신문사 대표도 불러 양자 대표와 회견을 하고 ‘사카마치 사건은 조선인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신문발표는 사실과 다르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이간을 노린 것이며 조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 따라서 사설에서 조선인연맹과 한국교민회에 대해 사과함과 동시에 즉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표책임자로부터 니가타현민에게 신문보도는 사실무근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하라’라고 압박했다. 니가타일보사 쪽은 사장 부재를 이유로 즉각 대답할 것을 피하고 ‘29일까지 유예를 바란다’라고 대답해 승낙되었는데 그 후 신문사 쪽에서는 화해할 필요성을 느껴 교민회 간부를 통해 약속 전날(28일), 동회 동(董)총무부장 외 2명의 간부를 니가타일보사에 초대하여 대화했다. 그때 요미우리 신문사 쪽은 불확실한 기사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설적인 사과 기사를 게재할 것으로 합의되었으나 니가타일보사 쪽은 ‘모든 것은 사실이 결정하는 것이며 진실이 밝혀진 대로 이로 인해 취소해야 할 점이 있으면 취소할 것이고 사과할 필요가 있으면 사과하겠다’라고 유보하려는 태도로 나섰기 때문에 교민회 간부는 ‘사실은 이미 명확하지만 해결을 지연시키는 것은 성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서 화해를 거부했다.
다음 날 29일, 조선인연맹 시바타지부 윤건 이하 18명은 지난번에 약속한 대로 니가타일보사를 방문하여 마쓰이(松井) 편집국장 외 3명의 대표자와 회견을 하고 26일의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보사 쪽은 ‘경찰 당국과 진주군정보부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선처하겠다’라고 답변했더니 ‘사실은 명백하다’라고 해서 양보하지 않고 양자의 의견이 대립하어 협상이 장기화할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조선인연맹 쪽의 한 명이 갑자기 마쓰이 편집국장에게 찻잔을 던진 것을 계기로 일제히 일본 대표자들에게 폭언을 던지고 폭행을 가하려고 해서 그 방은 소연해졌다. 그 소리로 사외에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조선인들도 사내의 각 방에 난입하여 의자를 던지고 전화기를 파괴하고 활자케이스를 발로 차는 등의 폭행을 하여 견적 30여만 엔에 달하는 손해를 입힌 외에 마쓰이 편집국장을 니가타 시내의 교민회 사무소로 연행했기 때문에 담당 니가타 경찰서에서는 진주군과도 연락해서 그룹 전원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은 종전 이후 각지에서 조선인 등의 횡포 행위가 겹친 시기이기도 하여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47년 3월 4일, 니가타지방법원에서 폭행한 그룹 중 9명에게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및 업무방해죄로 신탁승(辛鐸升)에게는 징역 10개월, 다른 8명에게는 징역 6개월(모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이 선고되었다.
p1063〜1065
조선인의 암거래 쌀 수송사건
전쟁 후 조선인이 부당한 행동을 해서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언급해왔는데 이 사건도 같은 조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1948년 3월 18일 오후 5시 30분경, 오지야마치(小千谷町) 경찰서 후루야(古谷)주재의 혼모 유키오(本望幸夫)준사 들이 순찰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기타우오누마군 오지야마치(北魚沼郡小千谷町) 교외의 차고바시(茶郷橋) 부근을 지나갔더니 2명의 조선인이 암거래 쌀로 보이는 것을 썰매에 실어 오지야초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여 직무 질문했더니 이에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모 준사에게 ‘우리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냐’라든지, ‘너는 병아리 준사라서 우리 얼굴을 모르는구나’ 등 반항적인 태도로 나서 혼모준사의 앞길을 가로막아 폭행을 가하려고 했다. 혼모준사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짐을 조사했더니 정백미 약 180kg(3짝)을 발견하여 그들을 식품 관리법 위반 현행범인으로 체포하고 그 썰매를 끌게 해서 중간에 다른 조선인들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본서로 연행하여 당직 주임으로 인도했다.
같은 날 밤 10시경, 이를 알게 된 오지야초에 거주하는 조선인 10여 명이 오지야초 경찰서에 몰려와서 상기 식량 관리법 위반 용의자, 기타우오누마군 오지야초 가미노야마(北魚沼郡小千谷町上ノ山)에 거주하는 미야모토 다케오(宮本武夫), 본명 이봉기(李鳳基,24)과 동 다케모토 소쿠(竹本相九, 조선명 불명, 27)의 2명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래서 다카하시 서장은 소재지의 모든 직원을 비상 소집하여 경계하게 하는 한편 용의자 2명의 신문을 서둘러 진행하고 같은 날 밤 12시쯤 일단 석방하여 그날은 무사히 끝났다.
다음 날 19일, 다시 상기 용의자 2명에게 임의출두를 요구하여 전날에 이어서 신문을 하고 있었더니 그 조선인들은 산조(三條)시, 나가오카(長岡)시 및 기타우오누마군(北魚沼郡), 미나미우오누마군(南魚沼郡)의 동포를 오지야마치에 집결시켜 용의자 2명의 탈환을 시도하려는 태세를 보였기 때문에 다카하시 소장은 국경현본부에 연락하여 인접한 각 경찰서에서 무장경찰관 40명의 파견을 받아 이에 대비하는 한편, 진주군 섭외 담당 장교 등 3명의 응원도 있어서 신문을 계속하고 그들의 자백에서 알게 된 암거래 쌀이 숨겨진 곳에 대해 진주군의 영장으로 추가 수색을 하여 정백미 329kg(5짝 여), 팥 194kg, 대두 49kg, 총 572kg을 발견하여 이를 압수, 상기 2명 외에 조선인연맹 기타우오누마지부 총무부장 시미즈 마사오(清水政雄), 본명 박석준(朴石俊, 27)을 긴급 체포했다. 신문 완료와 함께 3명의 신병을 나가오카구(長岡区)검찰청으로 호송하기 위해 같은 날 오후 4시 30분경 오지야 역에 도착했더니 미리 신병 탈환을 기도하여 집결된 조선인 약 80명이 각각 ‘미야모토, 다케모토, 시미즈를 나가오카로 보내지 말아라’라고 외치면서 이를 방해했으나 무장경찰관의 원호로 겨우 3명을 열차에 태웠다. 그 후에도 여전히 홈에 대기하고 있던 일파는 오지야역 아오키(青木) 조역에게 ‘열차를 출발시키지마. 출발하면 죽여버린다’라고 협박하면서 출발 조작을 방해했기 때문에 무장경찰관이 홈에 들어가서 이를 제지하려다 몸싸움이 벌어져 열차는 약 10분 지연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직접방해행위에 나선 기타우오누마군 호리노우치마치 미야하라초(北魚沼郡堀之内町宮原町)에 사는 조선인 아라이 사부로(新井三郎), 본명 박준희(朴準煕, 24) 등 10명을 공무집행방해죄 및 철도영업법위반 현행범인으로 체포하여 다른 사람들은 해산시켰다.
그들은 1948년 4월 30일, 니가타지방법원 나가오카지부에서 각각 징역형(최고 1년), 벌금형(최고 2만엔)의 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되었다.
p1066〜1072
다카다(高田)의 막걸리 사건
전쟁 후의 각종 물자 부족에 따라 암거래 물자 브로커는 물론 대규모 술 밀조와 식육용 소와 돼지의 밀살은 일본 본토에 사는 많은 조선인에게는 생활을 위한 상투수단이었다. 여기에 경찰의 단속이 들어가게 되자 ‘생활의 권리다’라고 해서 국내법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이는 궁핍한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에 경찰은 이 부분의 단속의 중점을 두고 세무서와 협력해서 니가타현 각지에서 대규모 단속을 실시했다. 그 중에서 매우 대규모로 밀조를 했던 것이 본건에서 말하는 ‘다카다의 막걸리 사건’이다.
나카쿠비키군 나카고무라오아자후지사와(中頸城郡中郷村大字藤沢) 및 동군 아라이마치 오이즈모(新井町小出雲)부락을 중심으로 한 약 80가구의 조선인 집단 부락에서 대규모 주류 밀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1948년 가을쯤부터 담당 나카고무라(中郷村) 경찰서 및 아라이미치(新井町) 경찰서에서 알게 되어 수시로 단속을 해오긴 했지만 철저한 단속을 하기에는 상당히 강력한 경찰력이 필요 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로 임하기로 하고 이 상황을 국경현본부에 통지하여 그 지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현본부에서는 방범통계과에서 담당자를 현지에 파견하여 양 기관이 함께 그 실태를 조사한 결과 철저한 단속을 하기로 하고 니가타지방검찰청, 다카다세무서, 담당경찰서, 인접 경찰서와 여러 번 사전회의를 열어 극비로 면밀한 단속계획을 세우는 한편, 필요한 자료를 모아 1949년 4월 6일, 재판관의 수사압류영장 발부를 받아 준비를 마련했다.
다음 날 4월 7일 새벽에 상기 밀조 부락(촌락)을 급습하기로 하고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현지 아라이(新井), 나카고(中郷) 경찰서를 비롯하여 나카쿠비키(中頸城), 히가시쿠비키(東頸城), 가리와(刈羽) 등 각지 경찰서, 국경현본부, 경찰학교 등에서 파견 요원 총 350명을 다카다시의 유적지인 다카다 성터에 집합시켜 검거대, 경비대 사진반 등에서 구성된 부대편성을 완료했다. 또한, 경찰관부대에 세무관료 7명이 함유되었고 니가타지방검찰청과 다카다구검찰청에서 이시하라(石原)검사 이하 9명, 니가타지방경제조사청에서 경제조사관 3명, 그리고 진주군 부대에서 니가타정보부원 2명이 참가한 대규모 진용이었다.
부대는 7일 오전 4시 40분, 나카고지구 중대를 선두로 트럭 14대, 대형 버스 3대로 나눠 타고 마침 내려온 찬비 속을 집합지를 출발하여 각 부대 모두 오전 6시 10분 전에 상기 밀조부락(촌락)으로 도착하여 일제히 단속을 개시했다. 목표로 하는 부락(촌락)에서는 대부분 집에서는 이미 부뚜막에 불을 태워 밀조주의 증류 작업을 했었으나 경찰부대 내습에 놀라 증거가 되는 기물을 숨기려고 하는 자, 경찰관에게 폭언을 던지며 단속을 견제하려는 자, 연락을 위해 옆집으로 달려가는 자, 큰소리를 치며 도망치려고 우왕좌왕하는 자 등 갑자기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사이에 단속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증거물건 조사 압수와 함께 피의자 체포, 현장 사진 촬영 등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 그들이 반항하는 틈을 주지 않고 오전 8시 30분경, 다음처럼 수세법 위반용의로 인적 및 물적 검거, 압수를 완료하여 양쪽 무대 모두 나카쿠비키 지구 경찰서로 귀환했다.
구별 부대별 |
검거된 피의자 |
압수한 물건 |
|||||
일본인 |
조선인 |
소주 |
전국 |
막걸리 |
누룩 |
기구 |
|
나카고지구 중대 |
5 |
26
|
3석3두1승 |
18석4두6승 |
11석0두6승 |
2석0두1승 |
376점 |
(595.8ℓ) |
(3323.8ℓ) |
(1990.8ℓ) |
|||||
아라이지구 중대 |
0 |
13
|
2석1두4승 |
6석0두5승 |
4석4두0승 |
|
115점 |
(383.2ℓ) |
(1089ℓ) |
(792ℓ) |
|||||
합계 |
5 |
39 |
5석4두6승 |
24석5두1승 |
15석4두6승 |
2석0두1승 |
492점 |
(982.8ℓ) |
(4391.8ℓ) |
(2782.8ℓ) |
비고. 다카다사건의 개황(나카쿠비키지구 경찰서 작성)에 의한다.
상기 단속 종료 후, 피의자의 신병을 나카큐바카자구경찰서에 인도하여 유치소(留置所)는 물론 무도장(武道場) 등에도 수용하여 수세법 위반사건으로서 신문을 시작했다. 한편 상기 밀조부락(촌락)의 조선인은 조선인연맹(조연) 신에쓰지부 조직원의 응원하에 그날 오전 10시 40분쯤부터 다카다시 경찰서 앞에 3, 4명씩 모이기 시작해 정오에는 부녀자를 포함해서 200여 명에 달해 각각 경찰을 매도하여 대표자를 세워서 피의자 석방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 요구를 경찰 쪽이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일단은 해산한 것처럼 보였으나 밤이 되자 10여 명씩 한 조를 이루어 파도처럼 경찰서 앞에 모여들고 폭언을 던지고 다음 날 8일 오전 3시경까지 사이에 10여 번 반복하여 끝내 경찰서 청사를 향해 돌을 던지고 유리창 10여 장을 파손시키는 등 폭력적인 태도로 나섰기 때문에 미리 경비. 배치에 있었던 경찰관은 그들 중 4명을 기물훼기죄 용의로 검거하여 그 외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또한, 지구경찰서장실에서 후지타(藤田) 서장과 이시하라(石原) 검사가 그들의 대표와 면접하여 석방 요구 협상에 응하고 있었으나 이 폭력적 행위를 계기로 협상을 중단했다. 이때 쯤부터 경비 태세 강화의 필요성이 인식되어서 그리고 각 지구, 각 시경찰에 대한 응원 요청 외에 긴급조치로 국경 나가노본부(国警長野県本部)에도 응원경찰관 파견을 요청했다.
다음 날 8일 오후 2시경, 조선인 약 200명이 전날과 마찬가지로 다카다시 경찰서 앞으로 모여 스크럼을 짜서 ‘적기가’로 기세를 올려 다시 대표를 내세워 석방을 요구해왔으나 경찰 측이 이에 응하지 않아 다음에는 세무서로 밀어닥칠 것을 서로 확인하고 오후 7시쯤에 해산했다. 이날부터 일본 공산당원에 의한 지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음 날 9일 정오를 넘어 한 명의 조선인 부인이 다카다세무서 창구로 나타났다. 전날의 동향을 보고 세무서에 대한 불온한 행동이 있는 것을 감지하여 미리 배치되어 있던 경찰관도 단순한 일상적인 용무로 온 사람으로 보고 신경을 안 쓰고 있었지만 얼마 안 되는 사이에 14, 15명의 조선인 부녀자가 다카다세무서 앞으로 모여들었다. 놀란 세무서 직원이 요건을 묻자 ‘서장을 만나게 하라’고 요구하여 ‘대표자를 내라’고 했더니 ‘모두 같이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보다 못해 경비 중의 경찰관이 세무서 밖으로 나가라고 권고했더니 경찰관에 반항하여 세무서 앞에 앉아 ‘살인자’라고 외치고 오후 1시경 4, 50명의 조선인(남자)가 몰려들어 ‘서장을 만나게 하라’고 각각 외치면서 세무서 내부로 침입하려고 했기 때문에 경비 경찰관과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관 쪽에 9명, 신문기자 2명, 조선인 쪽에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타이밍을 맞추고 대기했던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그 숫자는 100명에나 도달해 더욱 기세를 올려 세무서로 투석하고 습격하는 태도로 나섰다. 경찰 쪽에서도 다카다시 경찰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 130명을 급하게 파견하여 단속에 나선 결과 금방 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표와 시가마(志鎌)세무서장 사이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의 요구 내용은 ‘압류 물건을 돌려라’라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시가마 서장은 이에 응하지 않고 협상이 성립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 대표에게 퇴거를 명령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아 그중 한 명을 건조물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퇴거시켰다. 또한, 그때까지 일단 제지에 응한 야외 집단도 협상에 들어가자 스크럼을 짜서 조선 민족 해방의 노래를 크게 부르며 선동 연설을 하면서 기세를 올리며 견제했으나 오후 7시쯤 해산되었다. 이날 세무서 경비를 담당한 경찰관은 국경, 자경 합쳐서 446명에 달했다.
단속이 시작된 지 4일째를 맞이한 10일, 상기 아라이, 나카고 지구의 단속으로 검거된 피의자의 자백으로 다카다 시내에서도 상당 규모의 술 밀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같은 날 오전 8시를 목표로 이이다(飯田)경부가 지휘하는 1대 168명은 다카다시 혼초 2초메(高田市本町2丁目)에 소재한 조선인연맹 신에쓰지부사무소를, 또한 마쓰모토(松本)경부가 지휘하는 1대 74명은 다카다시 혼초 2초메 조선인연맹 신에쓰지부 부위원장 택을, 고야나기(小柳)경부가 지휘하는 1대 73명은 다카다시 기타혼초 3초메(高田市北本地町3丁目) 나카무라 초코(中村徴鎬) 택을 각각 급습하여 단속을 해 ‘소주’ 4두 4승(77.4ℓ), ‘막걸리’ 20석 3두 4승(3661.2ℓ), 기구 86점을 압수, 2명을 주세법 위반, 6명을 공무집행방해죄 용의자로 검거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밀조 시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그들은 생활권 옹호를 내세워 니가타현은 물론 나가노, 도야마 방면까지 그들의 동포를 다카다시에 모아 경찰에 맞서는 불온한 정세를 보이게 되었다.
다음 날 11일, 다카다시에 모인 조선인들은 니가타현 각지를 비롯하여 조선인연맹 나가노현지부의 일단도 합류하여 그 숫자는 500명을 넘을 것으로 보여 이들이 공산당 지도에 따라 ‘철저 적 투쟁’을 외치며 시위 활동을 했다. 그래서 경찰도 온화한 태도로 임하는 것은 그들을 조장시켜 오히려 사건을 분규, 확대하게 될 것이라고 인정하여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검거하는 방침으로 전환하여, 그리고 니가타현 본부를 비롯한 각 지구, 시, 초 경찰에서도 응원 경찰관의 추가 파견으로 태세를 갖춘 후 그들의 주모자로 보이는 간부 밑 공산당원 들 12명을 시위조례 위반 피의자로 검거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갑자기 사건의 조기 해결을 원하는 태도로 바꾸어 대표자를 내세워 더는 사건을 확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검거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노노야마(野々山) 경찰대장 이하 간부들은 연일 협상을 계속했으나 그들의 요구는 항상 변함없어서 경찰이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동안 그들은 주민들에게 ‘경찰이 조선인에게 부당한 탄압을 가하고 있다’라는 역선전을 해서 협력을 구하거나 ‘방화해서 다카다시를 재로 만들어버린다’라고 협박하거나 정부와 경찰을 비난하는 전단을 뿌려서 최대한 경찰을 견제하려고 나섰지만, 경찰은 이에 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드디어 공경 자세를 돌려 점차 돌아갔다. 이리하여 경찰도 사건이 발생한 지 10일째인 4월 16일, 이제서야 경비태세를 해제할 수 있었다.
이상 10일 동안에 걸친 본 사건의 경비처리에 동원된 경찰관 숫자는 별표와 같으며 니가타현에서는 전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한 폭력행위에 대해 일본인 6명, 조선인 26명, 총 32명을 공무집행방해죄, 시위조례위반 용의자로 검거 입건하여, 사건은 모두 고등법원 또는 최고법원까지 싸운 결과 다음과 같이 판결이 확정되었다. 참고로 본 사건과 관련해서 니가타현 시위조례에 대한 위헌소송도 진행되었으나 그 결과는 별항(926페이지)와 같음.
징역 벌금
실형 유무 |
1년 6개월 |
1년 2개월 |
1년 |
10개월 |
8개월 |
6개월 |
5개월 |
4개월 |
3개월 |
계 |
합계 |
||||||||
5 만 엔 |
4 만 엔 |
3 만 엔 |
3 만 엔 |
2 만 엔 |
2 만 5 천 엔 |
2 만 엔 |
1 만 5 천 엔 |
2 만 엔
|
1 만 5 천 엔 |
1 만 엔 |
2 만 엔 |
1 만 엔 |
1 만 5 천 엔 |
1 만 엔 |
|
|
|||
실형 집행유예 |
1 |
1
|
1 |
2 |
41 |
1 |
25 |
1 |
21 |
11 |
1 |
1 |
1 |
1 |
1 |
1 |
2 |
17 15 |
32 |
그 외에 8일 새벽 나가노현에서 경부를 장으로 한 1개 소대의 응원부대가 도착했으나 니가타현의 응원부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실제로 배치되지 않아 당일에 귀환했다.